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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이대로 ‘광복 100년, 분단 100년’을 맞을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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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제 우리는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았다. 그나마 지난 70년을 기억하는 세대가 남아 있기에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이대로 30년을 더 흘려보내 가만히 앉은 채로 ‘광복 100년, 분단 100년’을 맞을 것이냐고. 앞으로 남은 30년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과거와 싸우기보다 미래와 싸워야 한다. 적어도 30년 뒤에는 진정한 광복을 완성하고 ‘분단 100년’이 아니라 ‘평화통일 ○○주년’의 자축행사를 열어야 하는 게 우리 앞에 놓인 역사적 과제다.

 이런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제70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북한·일본에 원칙을 지키되 대화는 지속한다는 미래 지향적 노선을 분명히 한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에 대해 “정전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겨레의 염원을 짓밟은 행위”라고 비판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담화에 대해서도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북한에 “지금도 기회가 주어져 있다”고 강조했고 아베에 대해서도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주목한다”며 대화의 여지를 열어뒀다. 북한은 지뢰 도발로 광복 70주년에 찬물을 끼얹었고 일본은 진정성 없는 ‘과거형’ 사과 담화로 우리를 실망시켰다. 이번 경축사가 북한과 일본에 화끈한 비난을 기대한 이들에겐 미흡한 수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과 일본에 감정으로만 대응하기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 중국이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대국으로 떠오르고, 일본은 이를 명분으로 군사력을 팽창하고 있다. 미국도 일본의 이런 우경화를 묵인하며 한국의 동참을 요구하는 분위기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격변하고 있는데도 남북관계의 물꼬는 좀처럼 터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15일부터 표준시를 30분 늦춰 남북 간 분단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북한과 대화를 끊어선 곤란하다.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며 우리의 입지를 확보하려면 남북관계 개선만 한 카드가 없다.

 그런 만큼 박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엔 단호히 대처하되 인도적 교류는 지속하겠다고 밝힌 점은 적절했다. 이산가족 명단 연내 교환 등 실체적인 교류 제안을 내놓은 것도 대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박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서도 과거사와 안보·경제를 분리 대응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며 전향적 인식을 보여줬다. 아베 담화가 기대에 못 미친 점을 지적하면서도 담화 자체를 전면 부정하지 않고 실천을 통한 후속조치를 촉구했다. 아베를 원망하며 문을 닫아 걸기엔 일본은 우리 경제·안보에 긴요한 상대다. 아베의 언동에 일희일비하는 대신 큰 틀에서 일본과 바람직한 협력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 이제 공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박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보여준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해 과거사와 종군 위안부 문제에 전향적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내 상황에 대해서도 개혁과 ‘경제 살리기’ 의지를 다짐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총체적 난국이다. 양극화와 고령화로 성장엔진이 꺼지고 장기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청년실업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복잡해져 뾰쪽한 해법을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에 반비례해 정부는 위기관리에 번번이 무능을 노출하고 정치권은 표몰이만 신경 쓰는 이익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모범이었던 대한민국이 남미처럼 퇴행 국가로 전락할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과거와는 다른 성공 방식을 찾아야 한다. 지난 70년간 금과옥조였던 선진국 따라잡기 대신 변화된 환경에 적절한 새로운 길을 찾는 창의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과 정부는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 개혁을 집요하게 추진해 완성시켜야 한다. 또 북한에 대해 확고한 원칙과 유연한 대응으로 관계 개선의 끈을 놓지 말고 상황을 주도해가야 한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지속 추진하는 한편, 9·3 중국 전승절 행사와 미·중, 한·미 정상회담 등 하반기 외교 이벤트들을 적극 활용해 남북대화의 지렛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도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남북관계와 한·일 관계는 국민의 지지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렵다. 북한·일본과 관계를 악화시킬 요소들을 부각시키는 대신 출구를 열어두고 상대방의 태도 변화를 유도하는 현실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광복 70년이 재건과 중흥의 역사였다면 앞으로의 70년은 통일과 번영의 역사가 돼야 한다. 통일이야말로 남북 8000만 국민이 진정한 광복을 맞는 길이다. 우리가 세대·지역·계층 갈등을 해소하고 북한에 지속적으로 손을 내밀면 그 길이 훨씬 앞당겨질 수 있다. 광복 70년을 반쪽짜리 광복에서 온전한 광복을 이뤄 대한민국이 통일한국, 매력 국가로 나아가는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 적어도 ‘광복 100년, 분단 100년’을 이대로 맞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