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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광장] 한일관계, 이젠 성숙을 경쟁하자

중앙일보

입력

8월은 뜨겁다. 한국과 일본의 8월은 더 뜨겁다. 여름의 정점에 광복과 패전이 겹쳐 있어 언제나 뜨겁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는 차라리 불덩어리다. 양국이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는 아베 총리의 폭주(暴走)로 수만 명이 뙤약볕에서 시위하고, 패전 후 70년 동안 일본의 성장을 뒷받침한 평화헌법의 토대를 흔드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은 그런 아베 총리의 기이한 역사관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흥정이나 선심거리로 만드는 행태로 뜨겁다. 역사에 떳떳하지 못한 그의 처신이 머리만 숨기면 다 숨은 줄 아는 꿩을 닮은 것 같아 안타깝다.

아베 총리로 인해 한일관계는 표류하고,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그런 아베의 일본을 보면서 한일관계를 생각한다. "희망은 없는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인가"라고 자문해본다. 의외로 답은 간단하고 쉬운 곳에 있었다. 망언과 식언을 일삼는 일본 정치가들이 아니라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일본 국민에 있었다.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처럼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추모비에 무릎 꿇고 사과하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진심에 있었다.

그래서 생각나는 이들이 있다. 한 사람은 진창현씨다. 2004년 후지TV가 제작했던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의 주인공이다. 교사의 꿈을 안고 홀어머니 품을 떠나 해협을 건넜던 그는 대학 졸업 무렵 일본의 패전을 맞았다. 한국이 독립해 일본에서 교사를 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막막하던 차에 우연히 바이올린 제작자를 만난다. 그는 냉대 속에서도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했고, 마침내 한일 양국에서 존경받고 세계가 인정하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잘못된 정치와 야심에 사로 잡힌 전쟁세력들이 한 개인의 삶을 절망으로 몰아갔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은 조선통신사를 두 번이나 지낸 17세기 일본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林芳洲)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평등과 호혜를 사상의 근본으로 삼아 ‘성신(誠信)외교’를 펼쳤다. 부산에 와서 조선의 언어와 습속을 배울 정도였다.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외교의 시작이라는 그의 신념이 도쿠가와 막부는 히데요시가 망쳐놓은 한일관계를 복원했다.

또 있다. 세종 때 조선 최고의 대일외교관이었던 울산의 충숙공 이예 선생이다. 올 봄 국립외교원 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왜구에 잡혀간 모친을 구하려 바다를 건넜던 공은 마흔 번 넘게 해협을 넘나들며 667명을 구해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6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사설에서 충숙공에게 배우라고 일갈했다. 물살 거센 한일해협은 이런 사람들이 있어 길이 되었지만, 권력욕에 사로잡힌 야심가들 때문에 전선이 되기도 했다. 히데요시가 그렇고, 제국주의 일본이 그렇다. 끝은 폐가와 패전이었다.

이렇듯 빛과 그늘을 동시에 안고 조금씩 나아진 한일관계지만 지금은 아베 내각의 야심과 욕망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어딘가 수상하고 미덥지 못하다. 무언가에 쫓기는 인상마저 보인다. 어떤 길을 갈지는 그의 몫이지만, 착각을 하고 있을까 걱정이 된다. 한국이 사과와 반성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으로 생각할까 염려스럽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고 지레 겁이라도 먹을 것이라 오판할까 우려스럽다.

분명히 해둘 것은 한국은 100년 전의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상금 몇 푼에 자존심을 팔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역사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철저하게 역사에서 배우는 나라다. 역사에 고개를 돌리는 나라가 아니다. 물론 일본의 영혼 있는 사과와 반성을 바란다. 멀리 떠보낼 수 없는 이웃이라 그렇고, 뼛속까지 평화주의를 신봉하는 나라여서 그렇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가 되기를 바란다. 선한 이웃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한국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도 않고, 사과의 진심을 읽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뜨거운 8월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역사의 강은 역류도 하지만 순리에서 벗어나는 법은 없다. 그게 섭리다. 유한한 권력의 폭주가 아니라 그마저 품고 흐를 민의의 바다로 나아갈 때 한일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그것을 믿고 바라보며 성숙을 고민해야 할 때다. 반일·극일도, 시시비비할 때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70년이면 그러기에 충분한 세월이고, 우리에겐 그럴만한 힘도 있지 않은가.

김기현 울산광역시장

#한일관계 #광복70년 #아베 #진창현 #아메노모리 #충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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