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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전관예우 기대한다면 알려주고 싶은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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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전관예우에 관한 사회의 인식과 법원의 인식은 천양지차다. 사회에서는 재판 결론이 전관 로비에 의해 일상적으로 매매된다고 믿는 이들이 상당수다.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판사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치가 떨리게 억울하고 분하다. 하지만 비록 과거 하나의 잘못이 현재 열의 잘못으로 비치고 있다 하더라도 그 하나 또한 있을 수 없는 잘못이기에 변명할 수도 없다. 더 반성하고 더 조심해야 할 따름이다. 다만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있다.

 근래 한 30대 판사에게 들은 얘기다. 양형 기준상 집행유예로 이미 결론을 내린 사건이 있는데 재판 종반에 인연 있는 전관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더란다. 그러자 괜한 오해를 받는 게 싫어 혹시 실형이 맞는 건 아니었는지 사건을 전면 재검토했다는 것이다. 이게 새로운 법원의 정서다. 언젠가 나도 변호사를 하겠지 생각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장기 불황인 변호사 시장에 뛰어드는 판사는 줄어들고 평생법관제도가 정착돼 가고 있다. 정년까지 판사로 일할 건데 누굴 봐줬다는 괜한 오해를 감수할 이유가 없다.

 여성 법관의 급속한 증가 또한 큰 변화 요소다. 신규 임용 법관 절반이 여성이다. 술 먹고 골프 치며 ‘우리가 남이가’ 하는 한국식 정실주의 문화와 생래적으로 거리가 멀다. 근래 판사들끼리 전관예우 문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중 한 30대 여성 법관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있다. 아예 전관 로비를 시도하는 경우에는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보고 형을 가중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젊은 판사들만의 분위기가 아니다. 피고인 측이 재판장 지인을 동원해 선처를 호소하자 나이 지긋한 재판장이 아예 공개법정에서 이런 사실을 밝히며 불쾌감을 표시하고는 엄중 경고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생겼다. ‘약발’은 혹시 안 먹히는 경우가 있더라도 ‘밑져야 본전’이겠거니 생각하다가 외려 불이익을 볼 가능성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두 아이의 엄마인 30대 여성 법관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과로에 시달리다가 3주 전 부분 안면마비가 왔지만 짬이 안 나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일에 매진하다가 비극을 맞은 것이다. 이 일로 슬퍼하던 젊은 판사들은 바로 며칠 후 한국의 사법제도 신뢰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으로 콜롬비아 수준이라는 기사를 읽어야 했다. 과거의 부끄러운 잘못 때문에 원죄 없는 젊은 세대가 모욕을 당해야 한다면 분노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분노가 근본적인 변화의 불씨일지 모르겠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