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자본, 우리 기업 배꼽까지 다 보고선 정보만 쏙 빼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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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중순 매각 대상이 된 SK생명 인수 의사를 밝힌 기업은 3~4개에 달했다. 이때 미국계 생명보험사 메트라이프가 채권단에 제시한 인수가격은 3600억원이었다. 그러다 인수 가능한 회사가 메트라이프와 HSBC로 좁혀지자 메트라이프는 가격을 2900억원으로 낮췄다. 지난해 10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메트라이프는 채권단에 인수가격을 2300억원으로 낮추자고 요구했다.

채권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메트라이프는 SK생명과 메트라이프와 합병할 때 발생할 문제를 채권단이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채권단은 또 이를 거절했다. 메트라이프는 이달 초 돌연 인수 포기를 통보했다. 메트라이프는 2002년 초 대한생명 매각 입찰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협상을 포기했다. 이 과정에서 메트라이프는 SK생명의 과장급 직원까지 만나며 영업전략, 영업방식, 기업대출 정보 등 영업기밀에 속하는 정보를 입수했다.

국내 생보업계 13위(지난해 시장점유율 1.5%)인 메트라이프가 10위(2.6%)인 SK생명을 인수한다며 각종 정보만 빼내간 꼴이 됐다.

SK생명 관계자는 "배꼽까지 다 보여준 셈"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 인수합병(M&A)시장에서 외국계 자본의 행태에 대해 편법.탈법 논란이 커지고 있다. 기업 인수에 나선다는 명목으로 매각 대상 회사의 각종 정보를 빼내는가 하면, 매각 대상 회사의 몸값을 부풀리고, 회사를 살리기보다는 알짜 자산을 매각해 자금 회수에 나서고 있다는 비판이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1일 외국계 자본의 이익 챙기기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며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에 앞서 투기자본감시센터는 17일 브릿지증권의 대주주인 영국계 BIH를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대순 투기자본감시센터 법률담당 운영위원(변호사)은 "투기자본의 횡포로 브릿지증권은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BIH는 2002~2004년 네 차례에 걸쳐 브릿지증권을 유상감자해 2200억원의 투자자금 대부분을 회수했다. BIH는 지난달 브릿지증권을 리딩투자증권에 매각했다. 하지만 리딩증권은 인수대금 1310억원 중 자체 자금 20억원과 은행 차입금 187억원을 제외한 금액을 브릿지증권의 자산 매각대금으로 후납하기로 계약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는 BIH가 리딩증권에 증권사 면허를 넘겨주면서 브릿지증권의 우량 자산을 처분해 철수하겠다는 속셈이라며 비판했다.

지난해 12월 론스타의 동아건설 채권 입찰 참여도 내부정보 이용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론스타가 동아건설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의 최대 주주이기 때문이다.

진로의 주채권자인 골드먼삭스도 1997년 11월 진로의 외자유치 컨설팅을 하며 얻은 정보로 진로 채권을 헐값에 인수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당시 이 주장은 2003년 법원에서 "증거 없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골드먼삭스는 진로 매각 입찰을 한 달 앞두고 이달 초 외국 언론에 진로의 기업가치가 36억 달러(약 3조6000억원)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4월 법정관리계획안 인가 직전에 골드먼삭스가 제시했던 2조4000억원보다 50% 높은 것이다. 이 때문에 주채권자인 골드먼삭스가 진로의 몸값을 부풀리기 위한 언론 플레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은 최근 '투기성 외국자본의 문제점과 정책과제'라는 보고서에서 "외국계 금융회사와 주거래은행 관계를 맺고 있는 국내 기업들의 경영계획, 핵심기술, 재무상황 등에 관한 내부정보가 이들 기업과 경쟁관계에 있는 외국기업에 유출될 가능성도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금융경제연구원은 이러한 문제점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국가안보 차원에서 필요한 경우 사후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조사하고 투자 철회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조항을 외국인투자촉진법에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문제의 소지가 있는 투기성 자본의 금융업 진출을 억제하기 위해 외국투자자본의 적격성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한상의도 "외국계 사모펀드들이 M&A 위협이나 경영간섭을 통해 반대 급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고, 이 과정에서 집중투표제나 소액주주 보호장치가 악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창규.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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