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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납치·유괴… 딸들이 떨고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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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질을 살려주면 결국 붙잡힌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여대생 金모(21)씨를 납치해 끝내 살해한 범인 朴모(24)씨의 말이다. 공범(韓모.25)과 범행을 모의할 때부터 납치 대상자를 죽일 계획을 했다는 게 이들을 조사 중인 서울 강남경찰서 수사관의 말이다.

돈 때문에 멀쩡한 사람을 해치는 유괴.납치 사건이 잇따르면서 어린이, 특히 딸 가진 부모들이 불안하다.

특히 예전엔 주로 유아였던 범행 대상이 요즘엔 '돈 많은 성인 여성'들로 옮겨가고 있어 주목된다. ▶인질과 의사소통이 잘 되고 ▶옷차림 등으로 경제력 수준을 판단하기가 용이하며 ▶야간 범행이 가능하다는 이점 때문이다.

서울 용산경찰서 형사과장 이충호 경정은 "아이들과 달리 성인들은 현금.신용카드를 갖고 있다는 점도 범인들에게 매력"이라며 "그래서 납치기간 중 관리하는데 손이 많이 가는 어린이보다 어른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억력과 판단력이 어린이보다 뛰어난 성인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고 인질을 살해하는 흉포함도 더해간다.

金씨 납치.살해 사건의 범인인 朴씨와 韓씨는 처음엔 어린이를 유괴하려고 지난주 압구정동.연희동 등 서울의 '부자 동네'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적당한 대상을 찾지 못하자 표적을 '부유해 보이는 여대생'으로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올들어 언론에 보도된 주요 납치사건은 전국적으로 10여건. 특히 그 중 4건이 이달 들어 발생했다. 계속되는 불황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특히 카드 빚을 갚기 위한 '한탕'의 필요성이 범행의 주요 동기라고 경찰은 분석하고 있다.

목적이 돈인지라 범인들은 처음부터 철저히 부유층 자녀만을 노린다.

지난 3월 울산에서 발생한 초등생 李모(9)군 납치사건도 범인(38)이 며칠 동안 울산 시내 병원근처를 배회하며 의사들의 자녀를 노린 경우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최인섭(崔仁燮.49)실장은 "범인들이 납치 대상을 선정할 때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있다"며 "부유층은 차량이나 옷차림 등이 아무래도 돋보여 쉽게 범행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수사의 허점, 그리고 피해가족들의 성급한 대처가 사건 해결을 그르치는 경우도 잦다.

지난 4일 전남 목포에서 딸을 납치한 범인에게 돈을 건네주는 현장에서 범인과 격투를 벌이다 흉기에 찔려 숨진 정모(42.공무원)씨 사례가 그 중 하나다. 당시 주변에 미리 경찰이 배치돼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같은 날 인천 연수구 연수동에서 발생한 초등생 宋모(9)양 납치사건에서는 부모들의 강력한 요구로 경찰이 돈을 건네주는 현장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郭大瓊)교수는 "미국은 연방수사국(FBI)의 납치.유괴사건 전문요원이 협상에서 인질구출까지 모든 과정을 전담하고 있지만 우리는 납치사건을 일반 강력반에서 맡고 있어 전문성이 떨어진다"며 전담 수사인력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김정하.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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