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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22> 일본의 효자손] 들어는 봤나, 요괴인간 등긁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교토에 머문 지 어느새 두 주가 지났다. 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나만 그렇지 않음을 안다. 흐르는 시간을 의식할수록 나이 든 사람들의 말 못할 초조함은 커져만 간다. 가속된 시간의 끝은 죽음과 맞닿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가올 일주일 또한 눈 깜빡할 사이 흘러갈 것이 뻔하다. 비틀린 심정은 가만히 있는 시간을 언제나 앞질러간다.

8월의 교토는 무덥다. 다 아는 얘기지만 강조와 반복을 해야 정확한 상태의 표현이 된다. ‘더워도 너~무 덥고 습해도 너~무 습한’ 날씨는 미처 겪어보지 못했다. 한낮 최고 기온은 보름 넘도록 35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걸어다니면 이글거리는 햇볕에 숨이 턱 막혔다. 말로만 듣던 일사병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행자 입장에서 차 없이 걸어다니는 기분도 괜찮다. 오라는 데 없지만 갈 곳만 많은 방랑의 특권을 누려볼 기회 아니던가.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오기가 뻗쳤다. 가 보고 싶었던 절과 정원을 하나도 빼놓지 않을 기세였으니 말이다. 터덜터덜 걷다 보니 하루 새 17km를 걸었다. 걸음 수를 체크해 주는 스마트폰이 아니라면 나도 믿지 못할 거리다.

덕분에 남들이 가 보지 못한 유적의 뒷모습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골목골목 누비는 동안 주민의 입장이 되어 일본을 바라보았다. 더위 먹어가며 몸을 축낸 시간 속엔 삼십 년 넘게 드나들어도 느끼지 못했던 이웃의 디테일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역시!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의 칙칙함

아라시야마의 빈 집에서 혼자 지낸다. 자신의 아파트를 기꺼이 내준 친구 덕분이다. 그는 한 달 일정으로 뉴욕에 머물고 있다. 한국과 일본 미국의 삼각 축으로 돌아가는 공간 이동은 현실이 되었다. 이제 전 세계 어디라도 일터로 삼을 수 있다. 노트북 하나면 업무의 공백도 생기지 않는다. 제 몸뚱아리만 움직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작가의 삶이 이토록 편리할지 몰랐다.

며칠 지나지 않아 교토 생활에 적응했다. 말이 나오지 않는 일본어만 빼면 불편할 것도 없다. 아침이면 동네 약수터에 들러 체조도 하고 물도 길어온다. 아파트 아줌마들과 섞여 쓰레기 분리수거도 척척 해냈다. 집에 있을 땐 마지 못해 하던 일이다. 본토 일본인과 섞여도 전혀 구분되지 않는 얼굴은 이럴 땐 꽤 도움이 된다.

시간이 흐르자 친구가 쓰던 방안의 사물들이 내 것인 양 자연스러워졌다. 3년을 홀로 지낸 친구의 흔적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일상의 물건만큼 그 사람의 현재를 정확하게 드러내 주는 것은 없다. 혼자 사나 여럿이 사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줄어들지 않는다.

혼자 사는 남자의 가장 큰 어려움은 끼니 해결과 빨래다. 부엌 찬장엔 유통기간이 지난 조미료와 간장이 그득했다. 건강을 염려해 챙겨주었음직한 영양제와 식품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먼지만 뽀얗게 쌓여있다. 오랜 세월을 살아도 안정되지 못하는 혼자만의 살림은 이상하리만큼 서글퍼보였다.

걸어놓은 수건은 뻣뻣하고 냄새마저 풍겼다. 마누라가 집에서 챙겨주던 수건의 보드라운 감촉이 아니다. 마누라가 슈퍼에서 사들이던 섬유 유연제의 용도를 이제 알겠다. 아니다. 알아도 하지 못하는 게 남자들이다. 나름 깔끔한 성격의 친구다. 자주 먼지 털고 바닥도 닦았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커다란 벌레마냥 마룻바닥을 기어다니는 청소로봇을 들인 이유를 수긍했다.

그래도 감출 수 없는 구석의 먼지는 세월의 두께만큼 두터웠다. 남들과 똑같은 세제와 도구로 문질렀음직한 욕조와 타일 바닥엔 희미한 얼룩이 즐비했다. 주부가 빠진 빈자리는 컸다. 이래서 남자는 구박받으면서도 마누라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남자 혼자 사는 방의 공기와 색채는 언제나 칙칙하다.

책꽂이가 늘어선 거실의 소파와 책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이 책상에서 두 권의 책이 쓰여졌다. 의도된 단절의 외로움과 서글픔을 이겨낸 성과다. 아무리 멋있게 보여도 혼자 뒹굴거리며 말 한마디 붙일 사람 없이 보낸 시간은 즐겁지 않았을 터다. 소파 등받이 틈새에 무심코 놓아둔 효자손이 보였다. 대나무로 만든 등긁개다. 어릴 적 소풍 다녀온 기념품으로 할머니에게 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순간 울컥했다. 벌써 등긁개가 요긴해진 나이로구나.

날카로운 손톱에 시원…길이도 조절

아무리 손을 뻗어도 제 등을 시원하게 긁을 방법은 없다. 벌판의 소나 말처럼 땅바닥에 뒹굴거나 나무 등걸에 부벼대기 전엔.

최근 들어 마누라가 등을 긁어달라는 빈도가 부쩍 잦아졌다. 마누라의 요구를 난 한 번도 귀찮아 해 본적 없다. 나 또한 등이 가렵긴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한 이불 속에서 서로 등이나 긁어주는 남녀의 관계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래저래 슬픈 그림이 펼쳐지는 일상의 연속이다. 등긁개가 없어도 있어도, 나이 들어가는 선명한 징조를 지울 방법이 없다.

등이 가려울 땐 멀리 있는 마누라보다 우선 손에 잡히는 등긁개다. 빈 방에서 혼자 수 없이 등긁개로 제 등을 긁어댔을 친구를 상상했다. 평소 나를 만나면 “외로워, 워로워!”를 연발했던 이유를 알겠다. 내일이면 또 가려워질 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을 것이다. 며칠 살아보니 친구의 등긁개는 내게도 요긴했다. ‘도대체! 요즘 세상에 누가 등긁개를 쓸까’라는 비아냥의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사람 사는 일은 겪어보기 전엔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된다.

등긁개는 하나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기괴한 등긁개가 하나 더 보였다. 스테인리스 재질로 성형된 손 모양엔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인조인간의 손 같은 정교함에 금속 광채의 섬뜩함을 더했다. 영락없는 TV 만화영화 속 ‘요괴인간’의 손이다. 정령과 요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정서가 담겨있다.

대나무를 휘어 만든 등긁개가 전부인 줄 알았다. 로드 안테나 마냥 잡아빼면 길이마저 조절된다. 이 정도면 아무리 등이 넓어도 닿지 않을 부분은 없을 듯하다. 금속의 날카로움을 더한 손톱은 대나무 등긁개의 무딤과 차이가 난다. 새로 깎아 날이 선 손톱으로 긁어대는 느낌이랄까. 가려움이 진정되고 더 후련하다. 같은 용도의 물건이 바다를 건너면 이렇게 바뀐다.

전 세계 어디서도 이런 물건은 보지 못했다. 아마도 가장 독특한 형태의 등긁개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 등긁개를 사들인 이유가 더 중요하다. 충족되지 않는 가려움의 진정을 위한 예민한 선택인 까닭이다.

혼자 사는 이들의 외로움을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나는 누구에게인가 등긁개의 역할을 한 적 있던가. 반성은 자연스럽다. 등긁개를 우습게 보지마시길.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올 테니까. 서글픈 명품을 내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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