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 웃은 날 … 95년생 고진영 2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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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영은 물건이 될 것 같네요.”

박인비가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날, 한국 여자골프는 또 한 명의 수퍼 루키를 탄생시켰다. 해외에서 열리는 LPGA 투어에 첫 출전한 고진영(20·넵스)은 마지막까지 박인비와 접전을 펼치며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 골프팬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고진영은 마지막 날 1타를 줄여 합계 9언더파를 기록, 박인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고진영은 물건이 될 것 같네요.”

 지난 1일(한국시간) 스코틀랜드 턴베리의 트럼프 턴베리 리조트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네 번째 메이저 브리티시 여자오픈 2라운드. 시즌 2승을 거둔 김세영(22·미래에셋)의 아버지 김정일(53) 씨는 고진영(20·넵스)의 플레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세계랭킹 28위 고진영은 해외에서 열리는 LPGA 투어에 처음 출전했다. 영국도, 링크스 코스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3라운드까지 거의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고진영은 1~2라운드에서 가장 불리한 시간에 플레이를 했다. 첫날엔 바람이 가장 심했던 오전에, 둘째 날에는 최대 시속 40㎞의 강풍과 장대비를 뚫고 오후에 치고도 5타를 줄였다. 악천후 탓에 2라운드를 밤 10시에 끝낸 그는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3라운드를 시작했다. 그러나 16번홀에서 유일한 보기를 했을 뿐 버디 4개를 잡아 3타를 줄였고, 8언더파 공동 선두에 올랐다. 고진영은 “바람이 매일 달라 다른 코스에서 플레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에 따라 클럽만 바꿨을 뿐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똑바로 샷을 보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스무 살 고진영은 거침이 없다. 프리샷 루틴(샷 준비 동작)이 짧고 어드레스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샷을 날린다. 고진영은 “긴장되지만 외국 선수들과 치니까 재미있었다”며 웃었다. 박원 JTBC골프 해설위원은 “고진영은 ‘골프기계’처럼 훈련받은 선수”라고 했다. 지난 달 US여자오픈 챔피언 전인지(21·하이트)는 “진영이는 필(feel)을 받으면 무서운 플레이를 한다. 감이 아주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고진영은 올 시즌 LPGA 투어에 데뷔한 백규정(20·CJ오쇼핑)과 절친한 사이다. 백규정은 지난해 국내에서 열린 LPGA 투어 하나·외환 챔피언십 우승으로 올해 LPGA 투어 시드를 받았다. 지난 시즌 마지막 메이저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해 LPGA 투어에 직행한 김효주(20·롯데)도 1995년생 동갑내기다. 고진영은 “효주와 규정이가 지난해 LPGA 투어에서 우승하는 걸 보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나도 LPGA 투어에 합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셋은 박인비(27·KB금융그룹)·신지애(27·스리본드) 같은 1988년생 ‘세리 키즈’와 자주 비교된다. 세리 키즈는 매우 뛰어났지만 퀄리파잉(Q) 스쿨을 거치지 않고 LPGA 투어에 데뷔한 건 신지애뿐이었다. 세리 키즈보다 샷과 체력이 좋고 체계적인 멘탈 교육까지 받은 1995년생들은 Q스쿨을 거치지 않고 LPGA 투어에 직행하고 있다. 임경빈 JTBC골프 해설위원은 “젊음의 패기와 배짱이 좋다. 기본기도 잘 갖춰져 있는 것이 그들의 장점”이라고 했다. 

“골프도,인생도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3일(한국시간) 스코틀랜드 턴베리의 트럼프 턴베리리조트에서 막을 내린 시즌 네 번째 메이저 브리티시 여자오픈. 허리 통증과 샷 난조를 딛고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인비는 “포기하지 않았더니 행복한 순간이 왔다”고 기뻐했다. 다음은 우승 이후 박인비와 일문일답.

▲숙원 사업이던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는데.

“지금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너무 꿈꿔오던 일을 해냈다. 이번 주에 허리도 안 좋고, 샷도 안 좋은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부담을 덜 같고 경기에 임했기 때문인 것 같다.”

▲ 지난 2년 간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 앞에서 실패했던 경험이 독이 되기 보다는 약이 됐나?

“‘10번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된다’는 이야기처럼 언젠가는 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해같은 경우에는 정말 가까이 갔다가 놓친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작년 상황을 더 이상 생각할 수 있지 않게 돼 너무 기쁘다.”

▲ 골프를 시작한 뒤 가장 기쁜 날이 아닌가?

“지난 6월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메이저 3연승을 했을 때도 너무 기뻤지만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이 더 기쁘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어렵고, 정말 멀게만 느껴졌던 게 막상 현실이 되니까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 또 막상 하니 이게 다였는데 그동안 이렇게 힘들었나라는 생각도 든다.”

▲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여러가지가 있다.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물리 치료사에게 열심히 치료를 받았고, 남편, 부모님이 큰 도움이 됐다. 또 많은 것들이 있는데 이게 다 나 혼자의 힘으로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같은 경우 최근 2,3년 사이에 가장 퍼팅 감이 좋았는데 정말 퍼터 헤드를 볼에 댔다 하면 다 들어갔던 것 같다.”

▲ 가족의 의미는?

“가족의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할 거다. 골프를 아무리 잘 한다 하더라도 가족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 커리어와 가족을 바꾸라하면 절대 안 바꿀 거다. 가족은 내 인생의 전부고, 큰 의지가 된다. 가족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을 거다.”

▲ 그동안 마음 고생도 많았는데 돌아보면 언제가 가장 힘들었나?

“2008년 말부터 2011년까지 우승 없었을 때 골프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다른 것을 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스윙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을 때를 이겨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골프는 너무, 너무 안 돼서 포기해야겠다고 하면 갑자기 버디가 나온다. 포기할 수 없게 하는 마력이 있는 운동이다. 골프 뿐 아니라 인생도 그렇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 언젠가 해가 뜰거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힘든 순간을 즐기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여유, 겸허함을 마음에 담고 있다면 조금 더 편안하게 그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 같다.”

▲이번 대회에서도 비 오고 바람이 불고 경기도 안 풀려 포기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

”포기하고 싶게 하는 많은 상황이 오는 게 브리티시 여자오픈이고, 그런 상황을 이겨내야 하는 것 또한 이 대회다. 너무 어려운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회 전부터 ‘포기하지 말자’는 목표만 생각했다. 그래도 선두권과 멀어져 정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는데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런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나?

“긍정적인 마인드이고, 그 긍정의 마인드는 가족으로부터 나온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는 게 가족이고, 늘 힘이 되기 때문에 가족이 정말 소중하다.”

▲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는데, 남은 목표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고, 그 목표가 정말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2,3년은 더 보고 있었는데 그 목표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다. 아직은 구체적인 것은 없고 앞으로 찾아야할 것 같다. 전설적인 선수도 많고 바라보고 가야 할 선수도 많다. 그건 천천히 생각하겠다. 단지 지금은 현재를 즐기고 싶다.“

턴베리=이지연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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