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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영의 호모 디지쿠스] 의사 수입, 치킨집 노하우 … 이름 안 밝히고 솔직 답변, 익명으로 나누는 긍정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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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질문받습니다’ 글들. 네티즌은 익명의 댓글을 통해 솔직한 정보를 공개하고 나누고 있다. 주제도 신변잡기에서부터 고민 상담, 여행정보 등 다양하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유행 중에 ‘현역 OO입니다. 질문받습니다’라는 것이 있다. 익명으로 자신의 직업이나 경험에 대해 공개적으로 답변해주는 것인데 정해진 시간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불쑥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현역 치과의사입니다. 질문받습니다’라고 하면 평소 치과의사에 궁금해했던 질문이 쏟아진다.

 물론 가장 흔한 질문은 역시 ‘순수입은 얼마나?’ ‘가장 미운 환자는?’ ‘직원 뽑을 때 외모 따지나요?’ 등이다. 그러면 답변자는 나름 성실하게 대답을 해준다. 개업하면서 들었던 인테리어 비용, 처가에서 빌린 부채, 손님 수 등 공개하기 불편할 수도 있는 자신의 속사정을 상당히 자세히 설명해준다. 형식적으로 보기 좋게 다듬어서 보여지는 직업이 아니라 진짜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의 속사정을 이렇게 아주 잘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익명이기 때문이다.

 ‘질문받습니다’의 유래는 원래 일본의 2CH라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글을 게시한 사람이 글을 작성한 뒤 “질문할 것 있으면 해보라”고 한 것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인데, 사실인지 여부는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인터넷이 익명으로 순식간에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고 실시간으로 여러 사람의 질문을 순차적으로 답변할 수 있는 기술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네티즌이 서로에 대해 정보를 공개하고 나누는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받기 이벤트에서 인기 많은 부류는 모텔 주인, PC방 주인, 치킨집 사장님들의 사업 내역에 관한 것이다. 말 그대로 그 사업을 검토하고 있는 예비 창업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귀띔이다. 유명한 대기업의 내부 문화나 복지 수준도 관심사항이다.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중요한 사전 정보다. 이런 점에서 질문받기 이벤트는 선배 경험자들이 후배 경험자들에게 들려주는 생생한 정보가 된다. 가끔은 ‘결혼 3개월 된 남자입니다’ ‘방금 소개팅하고 돌아왔습니다’라며 질문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의 ‘질문받습니다’는 평소에 궁금해했던 대기업 입사 3년차의 세금 떼고 난 뒤 최종 급여 수령액이나 7급 지방직 공무원이 준비했던 수험공부 사연, 치킨집 사장님의 영업노하우 등을 적나라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질문받기를 스스로 자처하는 사람 가운데는 휴가 나온 군인이라며 ‘공군 일병, 휴가 나왔습니다. 질문받습니다’ 같은 내용도 있고 ‘패스트푸드 알바생. 일한 지 한 달 됐습니다. 질문받습니다’ 같은 것도 있지만 가끔 ‘은수저입니다’라며 자신이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나름 상당한 부잣집 자녀인데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는 경우도 있다. 또 더러는 ‘현직 독일입니다’ 라며 독일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는 등 사는 지역을 주제로 내놓는 경우도 있다.(이때 현직이라는 말은 직업이라는 뜻이 아니고 ‘현재 바로’라는 뜻의 인터넷식 표현이다.)

 흔히 인터넷은 익명 때문에 온갖 부정적 행위가 일어난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다. 익명 때문에 욕설이 난무하기도 하고 사실이 아닌 내용이 사실처럼 왜곡되기도 한다. 바람직하진 않지만 얼굴과 이름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익명의 힘을 빌려 세상을 향해 하소연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한다. 자기 회사의 높은 사람들 뒷담화나 갑을 비난하는 데 쓰이는 ‘블라인드’ 앱이나 ‘대나무숲’ 같은 서비스가 그런 종류다.

 그런데 ‘현직, 질문받습니다’와 같은 이런 익명의 ‘정보공개 잔치’는 또 다른 힘이 있다. 바로 익명이라는 긍정의 힘이다. 자신에게는 사소한 정보, 작은 비밀이지만 남에게는 큰 이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같은 익명이라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임문영 인터넷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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