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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의 위기와 국정 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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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전 산자부 장관

국가의 문제해결 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가운데 최근 학계는 사회 전반의 ‘거버넌스(지배구조)’에 주목하고 있다. 정부를 포함해 국가 운영에 영향을 주는 의회, 시민단체 등 다양한 조직과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의사결정 구조와 집행제도를 총체적으로 ‘거버넌스’라고 규정하고 이것이 국가 운영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요체(要諦)라고 보는 것이다.

 물건과 사람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까지 국가 간에 쉽게 이동하는 시대다. 따라서 국가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의사결정 참여기관들 간에 상황과 정보가 공유되지 않고, 권한과 책임이 모호하며 집행 매뉴얼이 낙후되고 집행자들이 전문적이고 헌신적이지 못할 경우 위기는 쉽게 확산된다. 거버넌스의 위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거버넌스 상황은 어떤가?

 먼저 국가 운영을 위한 의사결정 구조를 보자. 과거 개발시대에는 강력한 대통령의 통치력과 행정부의 권한을 바탕으로 하여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가 구축됐다. 이는 높은 생산성으로 연결되면서 고도성장이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위기 예방과 관리는 철저히 정부의 몫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대통령과 행정부의 중앙권력이 수평적으로는 국회로, 수직적으로는 지방으로 급격히 분화·이동돼 왔다.

 대통령과 국회는 견제와 균형의 수평적 관계로 변모하고 대통령은 여당의 총재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아직도 정부·국회·정당 등의 관계에서 과거의 수직적 리더십의 관성이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수평도 수직도 아닌 어정쩡한 의사결정 구조가 문제해결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특히 국회의 역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지만 작은 몸집으로 큰 칼을 차고 힘겨워하는 모습이다. 정부와의 책임과 권한 분담도 명확하지 않고 소위 국회 선진화법의 폐해도 크다.

 대통령·국회·정당 간에 민주적·수평적 협업이 가능한 의사결정 시스템과 문화, 그리고 이들 간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할 시점이다.

 다음은 효과적인 거버넌스를 위해 갖추어야 할 의사결정의 집행 매뉴얼에 대해 살펴본다.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대외 개방과 함께 자유시장체제가 확대 정착됐다. 이에 따라 정부 개입과 관료의 역할은 축소됐지만, 여전히 시장 실패에 따른 위험이 국가적 위기로 치닫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우리는 ‘천사’이기를 원했던 자유시장이 ‘악마’로 변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해 왔다. 이때마다 해결사로 정부가 등장했다.

 따라서 정부는 시장의 움직임을 점검하고(모니터링), 위험이 감지되면 조기경보 신호체계를 가동하고, 실제 위기가 닥쳐오면 즉각 개입하는 자구조치(세이프가드)의 수순을 밟아야 한다. 이러한 정교한 3단계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될 때 문제해결 능력은 확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관료의 상황 대응 매뉴얼은 정밀하지도, 체계적이지도 않고 담당자의 선택과 재량의 폭이 커서 한 번 잘못 판단하면 사회 전체로 위험이 확산된다.

 우리는 97년 동아시아 위기 때, 그리고 지난해 세월호 참사와 이번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이러한 3단계 위기예방관리시스템의 중요성을 피부로 절감하게 됐다.

 앞으로 우리가 쉽게 망각의 덫에 빠져 매뉴얼의 정비를 소홀히 하면 위기가 반복되는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가 운영의 직접적인 참가자들, 특히 국회의원, 정부 관료 등 공직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공직자는 국가 공동체와 국민에 대해 보상심리보다는 부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헌신과 충성심의 원천이며 문제해결을 위한 집중력의 기초 에너지가 된다.

 최근 들어 관료들은 몸과 마음이 시장에서 멀어졌고, 세태의 변화 속에 집중력이 다소 약화되었으며, 국가 공동체에 대한 부채의식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야구에서 유격수의 보이지 않는 에러 같은 감춰진 실수가 자주 목격됐다. 관료제도 자체도 노후화돼 공무원들을 지치게 하고 책임 회피에 골몰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정의 문제해결 능력은 약화됐다.

 완벽한 국가사회의 지배구조는 없다. 틈새와 결함이 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대화·타협·조정인 것이다. 그래도 확실하고 최종적인 조정자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5년 단임 대통령 중심제 자체를 수정해 어정쩡한 지배구조의 부작용을 방지해야 한다.

 공직자는 시대가 어떻게 바뀌든지 국가에 대한 무한한 부채의식, 책임의식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이 공직자의 숙명인 것이다. 정부와 사회도 공직자들의 헌신을 북돋울 수 있는 관료시스템을 하루속히 구축해야 한다.

 지금 국가 운영의 요체라고 하는 거버넌스의 모든 부문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국가 운영의 비상등이 계속 깜박이고 있다. 거버넌스의 변화 없이는 더 이상의 도약은 물론 지금 수준의 국가를 지탱하기도 힘겹다. 헌법을 고치든, 제도를 개선하든, 국가 운명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든, 국가 운영의 거버넌스에 대변혁이 시급하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전 산자부 장관

◆ 약력=고려대 상대, 위스콘신대 MBA, 외채협상 수석대표,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 국회의원, 중국사회과학원 정책고문 역임, NEAR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