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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취준생의 씁쓸한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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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A는 명문대 4학년생이다. 어려서부터 첩보영화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는 보고 또 봤다. 대학 입학 뒤 국가정보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부친의 ‘조국’ 강조 교육도 선택에 일조를 했다. 그런 뜻에서 카투사나 의경은 쳐다보지도 않고 우직하게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그는 지난 18일 국정원 공채 시험장으로 향했다. 막바지 준비 기간 내내 신문과 방송은 스마트폰 도청 의혹을 중계했다. ‘사실과 많이 다를 거야. 딴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하자’며 마음을 달랬지만 싱숭생숭한 기분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시험장인 서울 대치동의 D중·고에는 족히 2000명이 모였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이들이었다. 교실로 들어가기 위해 줄 서 있다가 중학교 동창 두 명을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합격하면 내가 국정원에 갔다는 걸 친구들이 다 알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영국 MI6, 이스라엘 모사드는 이렇게 지원자들을 한자리에 공개적으로 모으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A의 생각은 맞다. MI6는 채용 공고에서 가족에게도 지원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주문한다. 지원자를 한 곳에 모으지도 않는다).

 시험은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 계속됐다. 1, 2교시의 NIAT(국가정보적격성검사)는 IQ 테스트와 비슷한 것인데 예상보다 까다로웠다. 그중 마지막은 암호해독 능력 검사였다. 기호나 숫자에 특정 의미를 부여하는 공식을 제시한 뒤 기호·숫자 조합의 뜻을 유추하는 방식이다. 문제를 풀면서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이런 암호를 쓰나, 이런 게 필요하면 나중에 가르쳐주면 될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3교시 인성검사 문제 중에서 ‘친척들이 모였는데 한 명이 북한 핵은 북한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동북아 평화에 위협이 되므로 심각한 문제라고 말해 준다’를 가장 옳은 답으로 골랐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 친척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으니 그의 말을 존중해 준다’고 말하고 있었다.

 A는 낙방한다 해도 큰 미련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시험장에서 겪은 국정원은 그가 꿈꿔 온 곳과 달리 영 어설프고 시대에 뒤떨어진 곳이었다. “외국에서 스마트폰 해킹 프로그램을 살 때 왜 정체가 다 드러나게 계약했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시험 한번 보니 바로 알겠더라고요.” A의 말이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