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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 칼럼] '정권文化'를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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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권마다 독특한 문화가 있고 그것은 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음식만 하더라도 YS 때엔 칼국수.아구찜이 유행이었고 DJ 때엔 홍어.매생이가 이름을 날렸다. YS 때엔 어눌한 경남 사투리가, DJ 때엔 호남 사투리가 공공연했다.

이처럼 대통령이나 집권세력의 행태.취미.습관 등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국민에게 큰 영향을 주고 대중의 모방.흉내 대상이 된다. 그런 점에서 집권세력의 문화는 그 사회의 수준을 높일 수도, 낮출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 고위층 막말, 대중도 따라한다

노무현 정권도 이제 막 1백일이 지났지만 벌써 독특한 행태로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盧정권에서 가장 쉽게 느껴지는 특성은 좋게 말해 '격식 파괴'다. 그것은 盧대통령의 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그의 말은 이미 유행어로 정착된 감이 있다. "막 가자는 얘기죠" "성질 낸다"는 말도 꽤 유행되고 있다. "못해 먹겠다"는 말은 국내외 언론의 기사감이었다. 대통령의 잦은 막말에 감염된 탓인지 그 비서실장도 최근 실언을 했다. 자기의 윗사람인 총리를 '질타했다'고 했으니 큰 결례를 한 셈이다.

盧정권의 또 한가지 격식 파괴는 '튀는 행동'이다. 가령 이창동(李滄東)문화관광부 장관의 노타이와 지프 손수운전, 유시민(柳時敏)의원의 헐렁한 면바지 차림의 등원 따위에서 새 집권세력 내부의 어떤 문화를 느끼게 된다.

문제는 盧정권의 이런 독특한 행태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청와대 측은 이를 탈(脫)권위주의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과거 제왕적 대통령들이 국민에게 군림하는 자세를 보였는데 盧정부는 그런 권위주의를 탈피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더러 비속어를 쓰는 것도 서민적이고 솔직한 민주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노타이 차림도 다 넥타이를 매는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의 지향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권위주의적 격식을 깨고 대중에게 친근하고 민주적인 리더십은 정말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막말이나 비속어를 써야 탈 권위주의가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盧대통령은 어느 공식 석상에서 '개판'이란 말도 썼는데 굳이 그런 말을 골라써야 친근감을 주고 솔직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일까.

대통령은 깊은 생각없이, 또는 자기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통령의 막말이나 비속어가 초등학교 어린이부터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유행어가 될 때 언어문화의 저질화나 교육상 악영향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이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천한 말을 자주 하면 그 마음도 천해진다. 거친 말을 자주 쓰면 그 마음도 반드시 거칠어진다. 말따로, 마음따로가 아닌 것이다.

그러잖아도 요즘 젊은 세대의 언어에 문제가 많다. 거친말.비속어.욕설을 마구 쓴다. 고위층이 그런 젊은 세대를 잘 이끌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거기에 영합해 덩달아 막말을 쓴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집권측 언행 순화도 '중요 국정'

낡고 권위적인 격식의 파괴는 좋다. 그러나 품위.교양.예의.남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이 권위주의적 요소이거나 수구반동적 요소일 수는 없다. 오히려 더 장려.육성되고 정부와 고위층이 솔선수범해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요즘 세태를 보면 그런 덕목은 오히려 은근히 코웃음의 대상이 되고 튀고, 까불고, 떼쓰고, 막말하는 것이 득세하는 분위기다. 이런 현상이 盧정권의 독특한 문화와 관련없는 것일까.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막말을 하는 것은 막말을 은연 중 장려한다는 뜻이 된다. 대통령이 튀는 사람을 기용하면 튀는 행동을 장려하는 효과가 생긴다.

민주주의와 국가 경쟁력을 위해 개혁을 해야 하지만 점잖은 나라, 품위있는 나라 역시 개혁의 중요한 목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盧정부는 좋은 '정권문화'를 만드는 일에도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집권측의 언행.예절.인간관계 등을 더 순화.세련되게 하는 것도 중요한 국정이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