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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여행 가서 만나본다, 첫사랑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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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여행과 책은 환상의 커플이다. 여행지의 낯선 경험과 책의 내용이 기묘하게 맞아 떨어지면 예상치 않은 감동을 맛보기도 한다. [사진 현대카드 트래블 라이브러리]

맥베드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전예원
152쪽, 9000원

글렌 굴드 : 피아노 솔로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
222쪽, 7000원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민음사
153쪽, 7000원

미국 텍사스주의 마르파로 여행한 적이 있다. 마르파는 치후아후안 사막 가운데 위치한, 인구 2000명도 안 되는 작은 도시로,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 도널드 저드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곳이다. 저드는 군 기지였던 이곳에 여러 건물들과 대포 창고, 농장 등을 사들여 작품을 전시해놓았기에 도시 전체가 저드가 꾸민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행을 떠나기 전날 나는 다급해졌다. 해야 할 독서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꼭 읽어야 했던 화집이 있었고, 나는 다급한 마음에 결국 책의 일부를 찢어 가방 속에 넣고 말았다. 하지만 뭐, 여행을 떠난 나는 무척 바빴다. 오스틴에서 마르파까지 긴 드라이브에서는 시야를 가득 채우는 파란 하늘과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 무한히 뻗은 길을 보며 음악을 듣기에 바빴고, 막상 마르파에 도착해서는 하루 종일 저드의 건물과 작품들을 보느라, 밤에는 별을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찢어간 화집의 일부는 몇 줄 읽었을까…. 그 멀쩡한 책을 찢은 걸 나는 지금껏 후회한다.

 나의 이 슬픈 일화에서 우리는 ‘여행과 책’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첫 번째 문제는 여행지에서 과연 책을 얼마나 읽느냐는 것. 물론 해변에서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여행이라면 얘기는 약간 다르다. 하지만 대개 여행은 바쁘기 나름인데, 짐을 쌀 때는 언제나 허황된 야망이 생기고야 마니….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책을 읽는 거야! 비행기에서, 공항에서, 할 일 없는 밤 호텔방에서. 하지만 과연 그럴까. 비행기엔 공짜 영화가 있고, 공항은 시끄럽고, 일정은 빡빡하고, 몸은 시차로 피곤하다. 그래도 새벽에 잠 못 이룰 때를 위해 몇 권 챙겨야지 할 때 떠오르는, 두 번째 문제가 있으니 그게 바로 책의 무게다. 여행 가서 살 책들을 생각하면 또 머리가 아파지는데, 오페라에 신고 갈 구두라도 한 켤레 더 챙기고 싶은데, 고민스럽다. 생텍쥐페리가 그랬나. 여행이 즐거우려면 짐이 가벼워야 된다고.

박상미

 여행할 때는 얇은 책을 택할 일이다. 아무리 이 세상이 짐 드는 걸 도와줄 친절한 남성들로 가득하다 해도 짐이 무거우면 즐거운 여행에 얼룩이 생긴다. 그렇다고 책 한 권 없는 여행 가방은 속옷을 빼먹은 그것처럼 결함이 있다. 결정적으로 책은 여행이란 낯선 상황에서 평소의 나의 내면과 연결해줄 수 있는 고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이런 생각을 했고, 그래서 곁에 두어야 하는 책이 있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여행의 상황과 그 책의 내용이 기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예상치 않은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여행과 책이라는 조합이 주는 묘미다.

 올 여름 휴가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을 쌓아두고 어딜 떠날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어디 먼 곳으로 여행할 상상을 하며 얇은 책을 고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최근 『맥베드』가 새롭게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마리온 코티야르가 나온다니 궁금해진다. 『맥베드』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짧은 책으로, 지난해 다시 읽은 『햄릿』에 비하면 절반 정도 밖에 안 된다. 또한 가장 피가 낭자한 작품이기에 한여름 오싹함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운명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다. 맥베스가 마녀들의 예언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식으로 맞아 떨어지는 걸 보는 장면은 정말로 서늘하다.

 얼마 전 반쯤 읽은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도 챙겨 넣어야겠다. 앞부분에 이런 문구가 있는 책이다. “그가 속하고자 했던 유일한 공간은 끝없이 펼쳐진 북극 지대, 혹은 모텔 방의 이름 없는 벽들이었다.” 글렌 굴드는 은퇴를 선언하고 ‘북극의 개념’이라는 제목의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 책은 굴드에게 ‘북극’이라는 공간이 왜 설정되었는지, 그에게 고독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또 탐색하는 듯하다. 바하의 푸가처럼 주제가 반복되지만 책은 꽤 얇다.

 또 한 권을 꼽으라면 마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의 불어 원서. 내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돌아가는 책이다. 불어를 기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방식이랄지. 이 책을 프랑스인 친구와 함께 챙겨 떠날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 예전에 읽었던 영어판과 스마트폰 사전으로도 충분하긴 하다. 읽는 일이 쉽지 않지만 한 문장의 뜻을 파악했을 때 실제 뒤라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짜릿하다. 치열한 첫사랑을 묘사한 불어 단어들을 몇 건지는 일 또한 여름에 어울린다. 영어판과 불어판 두 권을 다 넣어도 부담되지 않는, 얇은 책들이다. 책은 골라 놓았겠다 어디 가까운 곳으로라도 떠나는 일만 남은 건가.

박상미 에세이스트, 『나의 사적인 도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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