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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두려움을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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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여울
문학평론가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나 난처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두려움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 순간 우리는 뼈아픈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나는 두렵다’고 고백하고 싶을 때 우리를 가로막는 마음의 장벽은 무엇일까. 두려움을 말할 수만 있어도 그 고통은 절반으로 줄어들 텐데. 두려움을 표현한다는 것이 곧 ‘나는 약하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공포와 불안을 표출하는 것이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자기검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두려움뿐 아니라 각종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까닭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두려움을 고백했을 때 적어도 세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첫째, ‘나는 두렵다’고 말하는 순간 ‘나도 두렵다’고 말하는 친구를 얻게 된다. 가진 것은 ‘젊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으며, 항상 감정의 허기를 느꼈던 20대의 어느 날. 나는 친구에게 고백했다. 여자로 산다는 것, 언젠가 결혼과 출산을 경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그 모든 것이 너무도 두렵다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고, 출산을 하고 나서 자신의 꿈을 이루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고. 영화나 드라마에는 있겠지만 내 주변에는 정말 없다고.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이 내게는 결코 쉽지 않았다. 친구는 나와는 달리 매우 낙천적인 성격에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였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친구 또한 내가 느끼는 불안을 항상 느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 친구의 깊은 속내를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명랑하고 유복해 보였던 그녀가 마음속으로는 수많은 공포와 불안을 숨긴 채 살아왔다는 것을. 그날부터 우리는 ‘비슷한 두려움’을 공유함으로써 더 따뜻하고 짙은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마음을 짓누르는 두려움을 차라리 고백함으로써 관계의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다. 내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바로 그런 사례다. 엄마와 나는 함께 살았던 20여 년간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했는데, 그 갈등의 뿌리는 나의 이상적인 성향과 어머니의 현실적인 성향의 극한 대립이었다. 나는 막연히 그러나 절실하게 글을 쓰고 싶어 했고, 어머니는 ‘뜬구름 잡는 불안한 일’에 큰딸의 미래를 저당 잡히기 싫어하셨다. 내가 대학졸업반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비장하게 털어놓으셨다. “나는 평생 누군가에게 져본 일이 없다. 나는 반드시 이겨야만 견딜 수 있다. 그러니까 너도 나에게 지는 척이라도 해주거라.”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안쓰러운 고백은 어린 딸의 흥분과 혈기를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었다. 그 후로 우리 모녀는 ‘나의 져주는 척’과 ‘엄마의 이긴 척하기’로 뜻밖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딸에게조차 져주기 싫어하는 엄마의 맹렬한 두려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나에게는 오히려 엄마에 대한 애정을 회복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셋째, 두려움을 고백하는 것은 약자의 자기 위안이 아니라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작가 귄터 그라스는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서 자신이 한때 나치에 부역했음을 고백해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자신의 작품이 번역된 상황에서 ‘나는 한때 나치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그 뼈아픈 고백이 담긴 자서전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뜨거운 감동과 빛나는 지성을 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마음 깊숙이 사과하는, 높은 사람들’을 보는 일이 하늘에 별 따기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치기보다는 ‘사과할 필요가 없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가르치기 때문은 아닐까. 사과할 필요조차 없는 높은 자리란 세상에 없다. 모든 잘못이 용서되는 대단한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잘못이 스리슬쩍 은폐되는 더러운 권력이 있을 뿐이다. 두려움을 고백하는 일,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일은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최고의 지성’을 갖춘 이에게만 허락되는 눈부신 축복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