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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항일 투쟁 … 우남 이승만은 국가 방향 제시한 선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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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마당에 서 있는 이승만 동상.

1965년 7월 27일 서울 정동 감리교회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영결식(7월 19일 서거, 9일장)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다. 여론 주도층에 퍼져 있는 반(反)이승만 정서를 의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본심은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도사에 잘 나타나 있다. 추도사는 “조국 독립의 원훈(元勳)이요, 초대 건국 대통령이신 고 우남 이승만 박사”라는 말로 시작한다. 박 대통령은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 가는 것을 보고 조국의 개화와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한 것은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일제 침략에 쫓겨 해외 망명 생활 30여 년간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 쉴 날이 없었던 것은 혁명아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칠십 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한 것은 오직 건국인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라는 강렬한 시선으로 이승만 박사를 묘사했다.

 우남의 장례 형식을 놓고 정부는 국민장을 하려고 했으나 4월 혁명동지회 등 4·19 세력들이 “국장도, 국민장도 사회장도 안 된다”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반면 허정·이범석·장택상씨 등은 “국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압박하는 가운데 유가족들은 최종적으로 가족장을 선택했다.

 박 대통령이 생전에 우남의 환국을 막았다는 통설도 그가 느꼈던 정치적 부담을 확대 해석한 결과다. 군사정부 시절인 62년 3월 17일 작성된 ‘박 의장 지시 사항’이란 제목의 외교부 문서(95년 공개)는 “이승만 박사는 정부의 허가가 없는 한 귀국하여선 안 된다고 (하와이) 총영사에게 지시하라. 국민의 감정이 풀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쓰여 있다. 이 문서가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우남의 환국을 거부한 증거로 제시돼 왔다.

그러나 문서에 수명자(受命者)로 적시된 김영주(93·훗날 외무부 차관) 기획조정관은 15일 기자와 통화에서 “당시 박 의장은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승만 대통령의 귀국 시기는 정부와 협의하는 게 좋겠다. 적당한 시기로 결정하라’고만 지시했었다. 문서에 왜 그렇게 과장된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모르겠다. 박 의장이 구체적으로 귀국을 하라, 말라는 식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이 이 박사의 귀국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박 대통령은 문서 작성일로부터 8개월 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하와이에 보내 이 박사를 환국시키려 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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