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나 때문에 고생” … 김포서 원내대표단과 한밤 통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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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떠나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표직을 내려놓으며’라는 사퇴 회견문을 통해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밝혔다. [김경빈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배신의 정치”에 대해 그가 한 답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는 7일 밤 자정 무렵까지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 머물렀다. 의원총회의 결과를 예견한 듯 밤새 사퇴 회견문을 준비했다.

 8일 오후 1시23분 국회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그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지난 13일간 제 거취 문제로 혼란이 일었던 점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청와대나 박 대통령은 사죄 대상에서 빠졌다. 그는 자신이 원내대표직을 사퇴하지 않고 버틴 이유를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라고 했다. 이어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저의 미련한 고집이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저는 그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날 선 문장의 회견문을 통해 자신의 사퇴를 압박한 청와대와 박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거부권 정국 이후 자신에 대한 사퇴 요구가 불거지자 유 원내대표는 한 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의원들의 뜻에 따라 선출된 만큼 그만두는 것도 의원들의 뜻에 따른다”였다. 원내대표의 거취를 논하는 정당 사상 초유의 의총이 열리게 된 건 유 원내대표가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사퇴를 권고키로 한 의총 결정을 수용했다.

 이날 그가 직접 썼다는 1025자짜리 회견문에 대해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박 대통령의 발언이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평했다. 특히 유 원내대표는 회견문에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를 언급한 뒤 “더 이상 원내대표가 아니어도 더 절실한 마음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고 강조했다. 앞으로도 박 대통령의 반대편에 서겠다는 의미다.

 지난 2월 친박계의 지지를 업은 이주영 의원을 따돌리고 당선된 그가 임기 5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한 건 청와대와의 불화 때문이다. 원조친박이었으나 박 대통령과 거리가 멀어진 그는 원내대표가 된 뒤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청와대를 향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날을 세웠다. 사드 배치 등을 두고도 의견 충돌을 빚었다. 영남 지역의 한 초선 의원은 “청와대와 계속 삐걱대는 모습에 불안을 느낀 이가 많았다”며 “이날 의총의 결과는 내년 총선을 앞둔 의원들이 박 대통령과 유 원내대표 중 대통령을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 원내대표의 낙마를 두고 선대의 악연이 이어졌다는 말도 나왔다. 유 원내대표의 부친인 유수호 전 의원은 유신 직후인 1973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 판사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당시 유 전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미움을 산 결과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왔다. 유 전 의원은 71년 대통령 선거 부정 혐의로 기소된 울산시장을 법정구속했다.

 유승민 정국의 주역이 사라짐에 따라 당·청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유 원내대표 개인으로선 여론의 주목을 받은 13일이었다. 일시현상일 수도 있지만 유 원내대표의 여권 대선후보 지지율은 16.8%(리얼미터, 8일)로 보름 새 11.4%포인트가 올랐다. 새누리당의 핵심 당직자는 “이번 회견문을 보면 박 대통령과 결별 선언을 하고 독자 노선을 걷겠다는 뉘앙스가 강하다”며 “거부권 정국을 통해 ‘전국구’급으로 격이 올랐다”고 말했다.

 거부권 정국에서 유 원내대표가 얻은 득실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서울대 강원택(정치외교학) 교수는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인지도가 올라가며 큰 정치적 자산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실제 얻은 게 없다. 내년 총선에서 공천받기도 힘들어 보인다”고 했다.

 유 원내대표는 사퇴 회견을 발표한 뒤 이날 밤 김포의 한 식당에서 원내부대표들과 밤늦게까지 통음했다. 그가 “나 때문에 마음고생 했고, 미안하고 또 고맙다”고 하자 일부 참석자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고 한다. 유 원내대표는 당분간 외부 활동을 자제하며 최소한의 의정활동만 할 것이라고 한다.

글=이가영·남궁욱 기자 ideal@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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