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南通新이 담은 사람들] 도시 농부 8년차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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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동 옥상 텃밭 가꾸는 박기홍씨

매주 ‘江南通新이 담은 사람들’에 등장하는 인물에게는 江南通新 로고를 새긴 예쁜 빨간색 에코백을 드립니다. 지면에 등장하고 싶은 독자는 gangnam@joongang.co.kr로 연락주십시오.

 논현동에 사는 박기홍(43)씨는 8년 전 어느 날 집 옥상에 텃밭을 만들었다. 자신이 사는 빌라의 35평(116㎡)짜리 옥상을 텃밭으로 꾸몄다. 달랑 상추 한 포기뿐이던 그의 텃밭에는 요즘 감자·단호박·오이·토마토·머루·미니양배추 등 50여 종의 채소가 자라고 있다. 텃밭에 필요한 물은 옥상 뒤편 2t짜리 원형 물탱크에 담아서 활용한다. 박씨는 지난해 7월 서울시가 주최한 ‘도시농업 최고 텃밭상’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지난달엔 서울시청 앞에서 도시농업박람회를 열었다.

 그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정보기술(IT) 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사내 서버를 유지·관리하는 IT 회사를 세웠다. 창업 초기 정신없이 바쁘던 어느 날 집에 오는 길에 누군가 공짜로 나눠준 상추 씨앗을 재미삼아 키운 게 텃밭의 시작이었다. 상추는 옥상에서 잘 자랐다. 박씨는 “직접 키운 상추를 밥상에 올리면서 ‘옥상 농사’에 재미를 들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동료들의 불행한 소식을 들은 것은 3년 전이다. 박씨는 “국내 굴지의 IT 기업에 다니던 친구들이 잇따라 과로사했다. 문득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던 나 자신에게 회의가 들었고 농사일에 더 열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회사 일과 상관없이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좋았다.

 동네 한복판에 만들어진 텃밭을 이웃들도 반겼다. 박씨는 “빌라로 가득한 삭막한 동네에 텃밭이 들어서니 사람들이 처음엔 신기해했다. 이제는 집 베란다에 작은 텃밭을 만들고 나에게 ‘농사 팁’을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텃밭은 4·5·8세 된 세 자녀의 좋은 놀이터다. 그는 “강남은 건물이 많고 도로가 비좁아 아이들 놀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아이들은 텃밭에서 직접 채소를 심고 가꾸면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농사에 매진하면서 본업을 통한 수입은 살짝 줄었다. 하지만 박씨는 요즘 행복하다. 그는 “직접 가꾼 채소를 이웃에게 나눠주며 여러 덕담을 나누는 일상이 즐겁다. 컴퓨터로 혼자 작업할 때의 답답한 마음이 뚫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둔 아내도 요즘엔 농사일을 거들고 있다. 박씨의 목표는 본업인 IT를 농업에 접목하는 것이다. 그는 “작물 주기를 기록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귀농인에게 제공하는 것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만난 사람=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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