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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기로에 선 유럽연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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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그리스의 국훈(國訓)은 ‘자유 아니면 죽음’이다. 19세기 초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 때 썼던 구호가 1821년 독립과 함께 그대로 국가의 모토가 됐다. 고대 페르시아 전쟁에서 제1, 2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상 그리스는 숱한 전쟁의 무대였다. 서구 문명의 원주민이란 자부심 속에 그리스인들은 외부 세력의 무수한 도전에 맞서 싸웠다.

 그리스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던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의 싸움은 주전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제 실시된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60% 이상이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 등 이른바 트로이카가 3차 구제금융 조건으로 제시한 추가긴축요구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즉 ‘그렉시트(Grexit)’를 배수진 삼아 결사항전하자는 마흔 살 젊은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도박이 일단은 먹힌 셈이다.

 그가 할 일은 이제 분명해졌다. 추가협상을 통해 부채 일부를 탕감받고, 긴축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유럽과 미국 채권자들의 눈에 비친 치프라스는 금융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에 도전장을 던진 무모한 좌파 포퓰리스트일 가능성이 크다. 그를 카운터파트로 인정하고 협상을 계속하기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협상을 해도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그리스의 디폴트(국가 부도)와 유로존 탈퇴로 막을 내릴 수도 있다.

 2010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는 2500억 유로가 넘는 천문학적 규모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았지만 대부분 원리금 상환에 들어갔다. 경제 회생에 투입된 돈은 8%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있다. 지금 그리스는 빚을 내서 빚을 갚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데도 한계가 있다. 긴축정책에 따라 이미 임금과 연금은 깎이고 복지 혜택도 대폭 줄어들었다. IMF 외환위기 때 한국이 했던 것처럼 평가절하를 통해 수출을 늘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통화 주권을 포기한 탓이다. 끝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이 지경에 이른 가장 큰 책임은 물론 그리스 자신에 있다. 고질적인 부패와 분수에 넘치는 복지, 세금이 줄줄 새도 손을 못 쓰는 국정의 난맥상이 근본 원인이다. 빚을 끌어다 흥청망청한 그리스 정부의 모럴 해저드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감당도 못할 빚을 마구 떠안긴 채권국의 대형 은행들과 그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한 미국과 유럽의 금융감독 당국에도 책임은 있다. 그럼에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보았듯이 대형 은행들은 대부분 무사히 빠져나가고 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다. 언제나 피해를 보는 것은 약자와 서민들이다. 지금 가장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의 빈곤층이다.

 유럽 단일통화는 무모한 도전이었음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재정통합과 정치통합이 전제되지 않은 통화통합은 원천적으로 불구일 수밖에 없다는 경고는 처음부터 있었다. 지금의 유로존에서는 독일처럼 경쟁력이 있는 나라는 득을 보지만 그리스 같은 나라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뿐 아니라 스페인·아일랜드·포르투갈도 위기를 겪고 있다. 유로화는 앵글로색슨의 신자유주의가 유럽 대륙에 심어놓은 ‘트로이의 목마’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다.

 그리스 사태에 진저리를 치며 유럽인들은 유럽통합의ㅍ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 이미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높아지고 있다. 유럽통합을 밀어붙여 온 브뤼셀의 관료들은 여전히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리스본 조약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스 다음은 스페인이 될지 모른다. ‘반(反)유럽’을 외치는 좌파 포퓰리즘 정당인 포데모스가 스페인에서 이미 제2당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프랑스에서는 반유럽의 선봉에 선 극우파 정당인 국민전선(FN)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EU는 기로에 섰다. 독일은 차라리 이 기회에 남유럽의 ‘클럽메드’ 국가들을 유로존에서 털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EU의 틀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EU가 깨지면 전쟁을 막기 위한 단일 유럽의 꿈도 깨진다. 이런 사태는 피해야 한다. IMF의 권고대로 일정한 부채 탕감을 통해 빚으로 빚을 막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그리스의 숨통부터 틔워줘야 한다.

 그리스의 불길이 잡히고 나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단일통화와 그 배경이 된 유럽판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까지 하나씩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유럽이 사는 길이다. 그리스의 선택이 죽음보다 자유를 택한 용기 있는 결정이었는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