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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룰포’ 벤치마킹 … 대법원 전원합의 재판 늘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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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미국 연방대법원은 2012년 8806건의 상고신청 사건 중 93건(1.1%)에 대해서만 상고를 허가했다. 2013년엔 더 적어 8580건 중 76건(0.9%)만 상고심 대상으로 선택했다. 상고허가제를 채택해 9명의 대법관 중 4명이 동의하는 사건만 상고심에 회부해 다수결로 평결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의 동성결혼 허용 여부에 대한 대법원 판결 역시 4명의 동의로 상고심이 진행돼 5대 4로 합헌 결정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 같은 ‘룰포(4인의 법칙·Rule of Four)’ 제도를 우리 대법원이 벤치마킹한다. 대법원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달 29일 열린 전체 대법관 회의에서 대법원장을 포함해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전원합의체 4인 소위원회’ 신설 방안을 확정했으며 13일 첫 회의를 연다”고 5일 밝혔다.

 양 대법원장이 위원장을 맡고 3개의 소부를 대표하는 대법관이 1명씩 참여하는 형태다. 1948년 대법원 설립 이후 전합 회부 여부를 판단하는 조직 신설은 67년 만에 처음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키코(KIKO) 소송, 통상임금 및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권 인정 여부 등 국민 인권과 실생활에 밀접한 중대 사건은 대법관 13명(법원행정처장 제외)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한다”며 “이런 전합 사건을 늘려가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신규 상고 접수 사건 가운데 ▶언론 보도 등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거나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력이 큰 사건 ▶쟁점은 같지만 사건 수가 많거나 후속 사건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통일된 법령 해석이 필요한 사건 등을 소위원회에 보내 전합 회부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후보 사건 선정은 수석재판연구관이 보조한다. 대법원은 기존의 전합 회부 방식도 없애지 않고 병행키로 했다. 소부 배당 후 주심 대법관이 정해지면 해당 주심이 법리를 검토해 전합 회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대법원의 미국식 ‘룰포’ 제도 도입 및 전합 심리사건 확대 방침은 대법원이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상고법원 신설의 동력 확보 차원에서 기존 대법원의 정책법원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2012년 28건을 기록했던 전원합의체 판결 건수는 지난해 14건으로 줄었다. 올해는 지난달까지 총 12건이 선고됐다. 대법원 상고사건이 지난해에만 3만7652건이 접수되는 등 13명의 대법관이 연간 처리할 사건 수(1인당 3000건 안팎)가 급증한 탓이라는 게 대법원 측 분석이다.

 이번 개편으로 전합 사건 회부 및 처리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기존 체제에서는 소부 배당→주심 결정→재판연구관들의 검토 보고서 작성→전합 회부 여부 결정까지 최소 3~4개월이 걸렸다. 최근 전합에 회부된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은 상고심 접수 1년8개월여 만에 전합에 회부돼 봐주기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앞으로 국민들의 실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사건들에 대한 전합 심리가 더 많아지고 결론도 신속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설 소위의 정기회의는 매달 전합 선고가 열리는 주(통상 셋째 주 목요일)의 월요일에 열린다. 위원의 임기는 6개월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통상임금 사건에서 전합 판결이 늦어져 사회적 혼란이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필요한 제도”라며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 이후 정책법원으로서 위상을 놓고 헌법재판소와 경쟁을 본격화하겠다는 의도도 깔린 것 같다”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대법원 전원합의체와 소부(小部)=대법원 사건은 원칙적으로 대법관 4명씩으로 구성된 3개 소부에 배당된다. 소부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대법원 판례를 변경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사건은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 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넘겨 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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