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그리스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김영욱
김영욱 기자 중앙일보 부소장
김영욱
한국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

유럽이 유로라는 단일화폐를 쓰자고 한 게 1992년 체결된 마스트리히트조약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환호했지만 미국인들은 매우 떫었던 모양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이렇게 비아냥댔다. “듣기엔 좋지만 완전히 난센스인 협정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이루어지겠는가”라고. 하지만 99년 1월 ‘무슨 일’이 일어났다. 유로화를 단일 화폐로 하는 유로존이 출범했다. 당시 나는 크루그먼의 지적을 시샘이라고 생각했다. 유일 기축통화인 달러에 어딜 감히 도전하느냐는 식으로 들려서였다. 실제로 유로존 출범 당시 미국 재무부 차관이던 로런스 서머스조차 “유로는 국제화폐가 아니라 역내 화폐”라고 격하했다. 달러패권은 유지될 거라는 뉘앙스였다. 미국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당시 아시아 외환위기로 이 지역의 맹주가 되겠다던 일본도 유로존 출범에 초조해했다. 아시아 통화통합론을 주창한 이유다. 그러니 세계경제 주도권을 유럽과 양분하게 된 미국의 시샘이라 생각할 수밖에.

 하지만 2010년 유럽 재정위기가 터지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급기야 엊그제 그리스가 부도를 맞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환율 주권 없는 통화통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왜 그럴까.

 98년 우리 경제는 풍전등화 상태였다. 97년 말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대대적인 긴축과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정부 지출은 대폭 줄었고, 금리는 폭등했다. 기업은 줄도산했고, 감원은 일상사가 됐다. 그때 우리를 살린 게 환율이었다. 원화가치가 급락하면서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고, 큰 폭의 무역흑자로 이어졌다. 이듬해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선 배경이다. 경제학에선 이를 변동환율제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외환시장의 불균형이 환율 변동을 통해 자동 조정되므로 국내 충격은 덜해진다는 논리다. 실제로 그랬다. 원화로 계산한 98년 국내총생산(GDP)은 그리 줄지 않았다. 97년에 비해 겨우(?) 1% 줄었다. 환율 급등으로 달러 기준 GDP는 급감했지만.

 하지만 그리스는 다르다. 유로화로 통합돼 있어 사실상 환율이 고정돼 있는 셈이다. 환율 주권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고정환율제에서 경쟁력을 높이려면 통화량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물가가 내려가고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국내 경제의 엄청난 충격이다. 유로화 기준으로 그리스 GDP는 2009년 이후 무려 26%나 줄어들었다. 유로존이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통화량을 늘리지 않았다면 그리스 GDP는 더 줄었을 게다.

 그리스 국민들이 지난 6년간 느꼈을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GDP가 1% 줄었던 외환위기 당시의 충격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서다. GDP 급감은 정치·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미친다. 예컨대 러시아 GDP가 90년대 초반 반 토막 났을 때 국민들의 수명이 크게 줄었다는 연구도 있다. 그리스에서 급진 좌파인 치프라스가 정권을 잡고 ‘위험한 도박’을 벌이는 게 이해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복지 포퓰리즘 역시 그리스 부도의 주요 원인이다. 공공 부문 근로자가 퇴직 후 받는 연금액이 퇴직 당시 근로소득보다 많았을 정도로 재정 낭비가 심했다. GDP 대비 국가부채가 180%나 되는 이유다. 채권국들이 그리스에 허리띠를 더 졸라맬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일리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긴축안을 받아들여 구제금융을 연장한다고 해도 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서다. 경쟁력 있는 산업이 없고, 환율 주권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 그렉시트의 충격파는 대단할 거다. 그렇더라도 먼 장래를 위해선 유로존을 탈퇴하는 게 맞다고 보는 이유다. 현 상태로는 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실력도 없으면서 당장의 달콤함을 위해 환율 주권을 포기한 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정치 지도자의 선택이 나라에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어떻든 우리는 그렉시트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짜야 한다. 유로화 급락으로 수출은 더욱 타격 받고 안전자산을 향한 국제자본 이동은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 영 욱
한국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