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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일 국교정상화 20년|일본의 원로작가「시바·료오따로」(사마료태랑)씨 특별기고|나의 상념의 지도<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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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나, 내일 아주머니 집에 갑니다.
이런 별난(?)어순을 가진 말이 우리들(한국인과 일본인―이하 같음)이 쓰고 있는 우랄알타이어족이다. 이 점에서 중국어나 영어·프랑스어는 다르다. 그 말들은 단어가 벽돌처럼 되어 있어서 문장이 벽돌을 쌓는 꼴로 이루어져 있다. 벽돌을 쌓는 구조물이 역학을 무시하면 성립되지 않듯이 중국어나 인도·유럽어는 고급스런 표현으로 하면 논리 그 자체라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 점을 보면 우리들의 말은 철사세공처럼 구불구불해서 구조로 보아 논리적이 아니다.『나 내일 아주머니 집에 갈거야』라고 말하면 히스테릭하게 되어 가출이나 할 것 같은 말투가 된다. 그리고 의지표현이 마지막으로 나온다.
『내일 아주머니 집에 가지…』까지 말하고는 한참 생각하고 나서『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반듯한 철사를 갑자기 구부리는 것 같은 꼴이다. 벽돌쌓기 구조가 아니므로 문장이 와해되지는 않는다.

<한국의 언어감각에 압도>
약간 독단이 되지만 이런 말을 쓰고 있으면 사고가 메마를 겨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논리는 건조한 것이다. 정서는 언제나 젖어있다. 한국인과 일본인 다수가 좋아하는 감상적인 가요곡을 듣고 있노라면 대뇌까지가 눈물로 흠뻑 젖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들이 본래 감상적인 민족 (복수) 이라기보다는 언어 (이 경우는 가사) 가 정서적이어서 우리들의 언어감각이 정서에 과민하여 작사음가 효과를 기대한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쪽의 언어적 감수성이 크게 전율하는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별히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대뇌생리학적으로 정서과잉의 민족(복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하,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다만 생각나는 대로니까 이야기가 철사세공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구부러질지도 모른다.
나는 구제중학을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갔을때, 나란히 잇대어 몽고어와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웠다. 가르치는 족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호화로운 공급이었지만 받는 쪽인 나의 머리의 용량이 너무 적어서 결국 한 마디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거야 어쨌든 몽고어라는 우랄알타이어의 일파를 배운 실감은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 귀중함은 비유해 말한다면 일생동안 닮지 않는 뇌지를 머리에 넣어 준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일본의 젊은이에게『한국어를 배워요』라고 권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젊은이가 일본어를 배워야 할까, 하는 의논을 해온다면 주저하지 않고『꼭, 적으나마 제2외국어로라도…』라고 권유할 것이다. 어느 경우건 이유는 하나다. 자기의 모국어와 같은 우랄알타이어의언어를 배움으로써 날붙이 (날이 서있는 연장의 총칭―역자) 를 숫돌에 갈듯하는 과정과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지닌 모국어를 객관시할 수 있어서 쌍방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여 인간의 언어 일반에 대해 생각하는 재미도, 찰 차려진 음식을 대했을 때 침이 괴듯이 솟아날 것이다. 결과로서 자기 속의 모국어가 연마될 것이며, 그 좋은 예를 지금은 고인인 김소운선생에게서도 볼수 있다. 나는 1954년께 그분과 대판에서 하루 저녁을 함께 지냈다. 만나기 전에 일본에서 이미 고전적 존재가 되어 있는 인물의 저작『조선시집』(암파문고) 에 의해 이 인물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만나보고 그 언어감각의 풍부성과 아름다움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김소운선생은 천재니까 실례로서 적당치 않을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는 몽고어를 배워서큰 merit를 얻었다 생각하고 있다. 단순한 하나의 예로서 우랄알타이어는 정서를 서술하는데 (불필요할 정도로) 너무나 적합하다. 우리들은 자기의 언어에 감정의 발목을 잡혀서는 안된다는 반성도 몽고어를 배움으로써 터득했다. 그 반성으로서 자기의 일본어 문장을 어떻게든 건조한 언어로 하며, 게다가 일본어의 정서적 특질을 잃는 일 없이 논리적인 명석성 (프랑스 사람이 귀중히 여기는 클라르테 : clarte) 에 접근시키고자 줄곧 생각해 왔다.
언어는 문명의 핵심이다.
같은 인도유럽어족인 구주인이 서로의 방언(각국어)을 배움으로써 자국어를 풍부히 해왔다.
예를 들면 영어의 70%는 프랑스어에서의 수입어라고 나는 듣고 있다. 언젠가 그것을 영국의 어느 애국적 지식인에게 말했더니『아니지요, 75%입니다.』라고 정정했다. 언어의 차용이라는 문명현상은 애국심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른 계열의 문제인 것이다.
유럽은 아리아인종이 방언과 지리적 환경 (때로는 정치적 이유) 에 의해서 여러나라로 잘라졌으면서도 상호모방 (듣기 좋게 말하면 문화교류) 에 의해 대문명을 이룩해냈다. 서양사를 읽어보면 법제·예술·학문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 왕성한 상호모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다.

<고도의 한자문명 일대도래>
이 점에서 아시아는 그러한 조건을 조금밖에 지니고 있지 않다.
일본의 언어사로 말하면 고대의 언어자료인『고사기』나『만엽집』은 거의 토어로 쓰였다. 영어로 말한다면 프랑스어를 뺀 15%로 쓰였기 때문에 추상적인 개념은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구체적인 연애감정이나 이야기는 전개되어 있지만「애」라는 추상어는 나오지 않는다. 어버이에 대한 효행의 우화가 나와도「효」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로서의 인은 없고 의도 없으며, 예도 지도 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추상어를 갖지 않은 이상 고대 일본인은 사물을 추상화해서 생각하는 수단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문화교류」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언어적으로 미개상태에 있는 일본열도의 사람들에 대해 한자문명권의 추상적인 사상과 언어를 폭포같은 기세로 보내준 사람들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고대 한국인이었다.
7세기에는 이 현상의 최종열거라 할만한 일대도래가 있었다. 663년 백제가 신라에 패배한뒤 거의 한나라가 이사를 하듯 하는 규모의 크기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중에는 한자문명을 풍부하게 몸에 지닌 지식인도 많았다. 도래초기 문부대신과 비슷한 자리에 취임한 사람도 있고, 또 관리가 되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의 일본국 정부는 백제의 선진성을 존경하고 있던 터여서 신분의 상하에 관계없이 그들에게 수도의 소재지인 지금의 나량현이나 수도에 가까운 자하현 등의 비옥한 전지를 주었다.『만엽집』의 대표적 시인의 하나인「야마노우에노·오꾸라」(산상억량·666∼733?)도 어렸을 때 아버지「오꾸닌」(억인)과 함께 그 도래의 큰 물결 속에 섞여있었다는 설이 있다 (중서진박사의 설).
그러한 배경을 생각하면서「오꾸라」의 시를 읽으면 다른『만엽집』의 시인들과 뚜렷하게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형이상적인 문명을 아는 사람밖에 갖지 못하는 지적 충수라고 해야할 그런 것이다.「오꾸라」의 시가 지금껏 우리들의 마음을 치는 것은 그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난외의 낙서같은 생각으로「문명」과「문화」에 대한 나의 정의를 말해 두려 한다. 문명이란 다분히 기술적이어서 어느 민족이거나 그것을 채용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는 로마자도 한자도 문명에 속한다. 다른 예를 들면 항공기건 자동차건 일정한 조종술을 익히면 만인이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또 민간의 항공기에 타면 승객은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서 벨트를 매고 금연표시를 보면 담배를 안 피운다. 이 점은 대한항공이건 에르 프랑스건 똑같은 룰이 지배하고 있다. 이 현상을 문명이라고 부르고싶다. 보편성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
이에 대해 문화는 특수한 것이다. 그 집안의 가풍, 또는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특이한 미신이나 풍습·관습을 가리킨다.
「누구나 참가할 수 있읍니다」라는 것이 문명인 이상, 문명은 고도하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문명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다.
한편으로「너희들 타민족으로선 이해하지 못할 거다」라고 하는 문화를 어느 민족이나 종이 한장의 표리처럼 하여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는 불합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말 이상으로 불합리한 것이면 그럴수록 그 문화는 그 민족의 내부에서는 자극적이라 할 수있다. 예를 들면 한국사회나 일본사회나 아득한 고대에 시베리아에서 발생한 샤머니즘의 정신적 습속을, 형태를 바꾸어서 지금도 가지고있다. 불교는 본래 보편적이어서 문명이어야 할 터이나 일본불교의 일부에서는 지금껏 불교는 종이의 표면이고 내용에는 현세의 이익이나 진혼을 위한 기도를 하는 식의 주술성이 배접되어 있다. 하지만 기독교도 불교 이상의 보편성이 높은 종교문명이지만 한국의 기독교의경우 신자측에 샤머니즘의 요소가 전무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유럽의 기독교도 그럴 것이다.
예수의 보편사상이 유럽에 뿌리내린 것은 신앙이라는「문화」와의 절충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다. 이상은 나의 용어로서의 문명과 문화의 관계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예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인다면 나의 서술법에는 자신도 별나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긴 로프(이경우는 실례) 를 탑처럼 감아 올려 가서 속에 중공이 생긴다. 그 중공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인데 그 주제를 말로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 알아차려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을 하는 방법은 다분히 일본적이다.『좀처럼 서양인으로선 알기 어렵군요』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지만, 아마도 한국인으로서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정서적이면서 일본인보다 훨씬 논리적이다. 그 논리에는 때때로 날붙이 같은 맛이 있다. 그에 비해 나의 서술법은 회화와 같다. 한 장의 그림에는 원경·중경·근경이 있는데 지금 원경과 중경을 말하고 있다. 한참 동안 동행해 주기 바란다.
한일 두 민족은 한자라는「문명」을 공유하고있다. 이것은 나의 두 민족 풍경에 있어서의 중경에 해당할 것이다.
한자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의 발명이다. ―편리하니까 다른 민족도 이용한다. 이런 것이 문명인 이상은 동아시아에서 한자만큼 중요시된 문명은 없었다.

<한문이란 거대한 언어유산>
고대의 중국은 광대한 농업의 적지였기 때문에 거대한 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한민족은 본래의 것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말하자면 양성되었다. 주변에 있던 다양한 문화 (특수한 것) 를 가진 여러 민족이 식물과 생활의 안정을 찾아서 흘러 들어왔다.
고고학적으로 최고의 왕조로 꼽히는 은도 이(야만인) 이며, 그것을 넘어뜨린 주도 또한 다른 이였다는 설이 있다. 나는 맞는다고 생각한다. 이란 이 문장의 정의로 말하면 자기 나름의「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중국에는 지금도 50여 종류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그들의 선조가 중국대륙이라는 거대한 도가니에 각자의 문화를 가져다가 녹여댔다. 그 결과의 산물이 한민족이며 중국문명인 것이다.
문명은 누구나가 참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지만, 중국이라는 광대한 토지와 다양한 사람들은「문명」이 아니면 통치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예를 들면 중국은 다양한 언어군을 가지고 있다. 소리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의미를 갖는 형상 (한자라는 표의문자) 을 가지고 서로 이해하는 식의 문명을 채용했다.
만약 한자라는 문명의 이기가 없었다면 중국은 통일된 국가로서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자는 문장을 구성한다. 한문은 중국각지에 통용하는 공통언어가 되고 문장으로 서로 생각을 교환했다. 이에 따라 고도로 문장이 발달했으나 부작용으로서 높은 표현능력을 갖는 구어가 오래도록 발달되지 않은 단계에 머물러 중국사에 있어서 문명정돈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표현을 한다면 명예로운 정돈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한문이라는 거대한 언어유산을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1월4일자 (일부지방 5일)에 계속>
「시바·료오따로」약력
▲본명「후꾸다」(복전정일) ▲1923년 오오사까(대판)출생 ▲대판외국어대몽고어과수료 ▲46년 신일본신문사에 입사, 산께이신문을 거쳐 61년 퇴사 ▲재직중 역사소설을 발표 ▲59년『효의 성』으로 직목상 ▲작년『용마가 간다.』등으로 국지관상 ▲68년『순사』로 매일예술상 ▲72년『세상에 사는 나날』등으로 길천영치문학상 ▲82년 조일상 수상. 그의 작품은「국민문학」으로서 일본국민들 사이에 가장 폭넓게 읽혀지고 있음. 저서로는『고대일본과 조선』『조선과 고대일본문화』『역사의 교차로에서』『일본인의 얼굴』『일본의 조선문화』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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