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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군살 빼기·집안 싸움 등 몸살 | 부심심했던 재계의 한해를 돌아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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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금년에도 재계는 바람잘 날이 없었다. 연말까지 진로·거화가 집안싸움으로 세인의 눈길을 끄는가 하면 정부의, 긴축과 대기업 여신규제로 기업의 돈타령이 여느 때보다 훨씬 세찬 한해였다.
올해의 가장 큰 이슈는 부실기업 정리. 해외건설·해운 등 구조적 불황산업에 정부가 강력한 메스를 대기 시작했다.
워낙 물린 돈이 많다보니 없앨 수는 없고 국제금융이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재벌의 문어발 규제논리와는 정반대의 합병이나 이른바 위탁 경영도 잇달았다.
경남기업이 은행에 큰 손실을 안긴 채 대우로 넘어갔고 삼호는 대림사업이, 남광토건은 쌍룡종합건설이 각각 위탁 경영을 맡았다.
63개나 되는 해운회사를 17개로 줄이는 수술 작업도 본궤도에 올랐다.
세방해운이 범양전용선과 합병했고 흥아해운이 법정관리로 넘어갔는가 하면 삼미는 가졌던 배를 모조리 팔아 치우고 아예 해운업에서 손을 떼버렸다. 대한 선주는 서주우유 매각 등 대폭적인 감량 경영에 나섰다.
해운업 정리는 일단 정부의 개입으로 수술대 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도 각 사의 이해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다 3천억원 정도의 자기 자본에 2조원의 엄청난 부채의 정리방안이 마련되지 않고 있어 다시 표류될 소지가 많다.
섬유업계도 어두운 한해를 보냈다. 가장 큰 수출시장인 미국의 주문량이 뚝 떨어진 대구의 조제트직물업계는 올해 내내 심한 몸살을 않았다.
동국무역·남선물산·(주)갑을 등이 구제금융을 받아 겨우 제품을 꾸리는 통에 1천 5백여개의 대구지역 하청 업체들도 불황의 늪에서 허위적거려야했다.
지방경제의 어려움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올해는 유난히 두드러졌다.
대구지역은 섬유업계의 어려움에다 정화학원의 부도가 겹쳐 긴급 수혈을 받아야 했고 전주는 영생학원 부도로, 제주는 명륜학원 부도로, 마산은 광신건설 부도로 큰 혼란을 겪였다.
기업환경이 어렵다보니 대기업의 군살 빼기도 자주 눈에 띄었다.
금호그룹이 광주고속과 금호건설을, 삼양타이어와 금호실업을 각각 합병했고 삼미는 그룹간판격이던 삼일로 빌딩을 팔아 치우는 한편 해운을 정리하고 삼미특수강의 주식일부도 내놓는 등 체질강화작업을 벌였다.
대표적 부동산 재벌로 손꼽히던 삼호가 역삼동 땅을 비롯해 수원 컨트리클럽·제주 오나골프장 등에다 조봉구 회장의 방배동 집까지 내놓았는가 하면 진흥기업은 서대문 사옥을 팔았다.
기업의 암울한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주의 대명사격인 진노가 집안 싸움을 벌여 장익용 사장이 10년만에 물러나고 사촌인 봉용·진호씨 체제를 갖췄고 거화는 부자간의 불화로 김창원 회장이 거화와 코리아스파이서를 남에게 넘겨야 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바깥으로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연초부터 시작된 미국의 컬러TV 덤핑 판정 시비는 결국 잘되기는 했으나 한미간의 감정 문제로까지 비화하는 파란을 겪었고 이밖에도 철강·신발에서 피아노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수출 품목이 보호무역장벽 아래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경기가「안정적 호황」국면이냐,「하강」국면이냐 하는 정부와 기업 간의 논쟁도 열을 뿜었다.
경기 하강 때문인지, 기업의 과잉 의욕 탓이었는 지는 몰라도 대 그룹들의 매출은 거의 모두 당초 예상보다 5∼10%씩 못미치는 결과를 낳았고 시설이나 연구 개발 투자도 매우 부진했다. 빡빡한 살림이지만 첨단산업에 대한 기업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현대그룹은 그룹의 주력 사업을 건설·중공업에서 자동차·전자로 전환시킨다는 전략 하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이천공장을 완공시켜 반도체사업에 첫발을 디뎠고 미국의 인모스사와의 제휴로 내년에 2백 56KD램을 시험 생산, 내년 초 양산 체제에 들어가기로 했다.
럭키금성도 64KD램의 조립 생산에 들어갔고 게이트어레이를 미국에 대량 수출하는 길을 텄다.
그러나 한국전자 기술연구소를 인수, 반도체 사업을 벌이려던 대우그룹은 자금력 부족으로 중도 포기해야 했다. 반도체와 함께 미래산업의 양대 축으로 꼽히는 유전공학도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삼성그릅의 제일제단이 미 유진텍사와 제휴, 미국과 한국에 연구소를 세웠는가하면 럭키는 미 카이론사와 합작, 럭키바이오테크사를 세웠다. 이밖에도 두산그룹·태평양화학·미원·녹십자·동아제약 등이 유전공학 분야의 고지 선점을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기업의 해외 진출도 두드러졌다. 삼성전자가 미 뉴저지주에 컬러TV 등을 생산할 대규모 현지 공장을 세웠고 국제그룹은 호주에 15억달러 규모의 알루미늄 제련 공장 건설에 착수했는가 하면 튀니지에 섬유·철강회사를 차렸다.
유공을 비롯한 삼환기업·현대종합상사 등이 북예멘의 마리브유전개발에 참여, 일단 성공케이스로 굳혀졌고 럭키금성이 인니에, 삼성은 말레이시아의 유전개발에 참여했다. 코데코가 인니의 마두라 유전개발에 성공, 우리 손으로 퍼 올린 기름을 국내에 처음 들여왔다.
기업의 얼굴들도 적지 않이 바뀌었다. 창업주들의 타계가 잇달았고 최고 경영진의 자리바꿈도 어느해보다 많았다.
현대그룹은 정주영 회장의 5남 몽헌씨가 현대상선 사장에 그룹주력사업인 전자 사장을 겸임해 2남 몽구씨(정공·자동차서비스·강관 사장), 6남 몽준씨(중공업 사장)와 함께 2세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현대그룹에서는 올들어 그룹 감사 체제를 강화, 인천제철의 임원을 대거 바꾸고 연말에 현대미포조선과 현대중전기의 인사이동을 실시하는 등 문책 인사가 많았고 매일 등 회장이 주재하던 중동회의 중 절반은 이명박 사장이 맡고 그룹 간판인 현대건설을 공개한 것이 큰 이슈.
삼성그룹은 조우동중공업 회장이 고문으로 일선에서 물러앉았고 안병휘 건설 사장·이수빈 제당 사장이 도미 유학 등으로 경영에서 손을 뗀 것이 특징.
올해 이강태 건설 사장·이종규 중앙개발 사장·한형수 제일합섬 사장 등이 새로 사장 자리로 올라섰다.
럭키금성은 구자경 회장이 대권을 승계한 이래 14년만에 가장 큰 폭의 변화가 있었다.
허준구 금성전선 회장이 그룹 통할 부회장직을 맡고 구평회 호유 사장이「럭키」계열 부회장을, 허신구 금성사 사장이「금성」계열 부회장을 떠맡아 회장단을 크게 보강했다.
또 변규칠씨가 그룹기획 조정실 사장을 맡고 이헌조씨가 럭키금성상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한성갑씨가 럭키콘티넨탈카본 사장으로 승진, 공채 1기로 첫 사장이 됐다., 지난해 KAL기 사건을 겪었던 한진그룹은 진용을 크게 바꿨다.
조중훈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일단 일선에서 물러앉고 바로 아래 동생인 조중건씨가 KAL사장을, 둘째 동생인 중식씨가 한일개발 사장을 맡았다.
이밖에도 2세 승계 체제를 구축, 조 회장의 장남인 양호씨가 KAL 전무, 2남 남호씨가 한일개발 전무, 3남 수호씨가 한일개발 이사로 각각 승진했다.
연말에 큰 인사를 한 한국화약은 부회장직을 늘려 회장 보좌 체제를 강화했다.
최각규씨가 한양화학 회장에다 경인에너지 사장으로 주력 기업을 떠맡았고 신현기 대평양건설 사장과 조충훈 대한화재 사장이 각각 그룹 부회장직을 맡았다.
두산그룹도 박용곤씨가 그룹 회장을, 동생인 용오씨가 신설된 그룹 부회장을, 용성씨가 그룹기획 실장 겸 동양맥주 사장을 맡아 3형제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창업주의 타계도 적지 않았다.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 박인천 금호그룹 회장,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 남상옥 국제약품 회장이 세상을 떴다.
금호그룹은 이에 따라 박 회장의 장남인 박성용씨가 그룹 회장을 맡고 2남 정구씨가 금호실업과 삼양타이어의 합병회사인 (주)금호사장과 광주고속 사장을 겸임하며 3남 삼구씨가 (주)금호의 무역부문 사장, 4남 찬구씨가 금호화학 부사장을 맡았다.
선경그룹은 유공 인수의 1등 공신인 김항덕씨를 유공 사장으로 승진시켰고 창업주의 장남인 최윤원씨를 선경합섬 전무로 승진시켰다.
국제는 양정모 회장의 다섯째 사위인 김덕영씨를 부회장으로, 맏사위인 한윤구씨를 국제상사의 생산 담당 사장으로, 네째 사위인 김내영씨를 동서증권 부 으로 승진시켰다.
이밖에도 올들어 새로 사장에 오른 사람들로는 박창호(갑을) 김실동(삼미유나) 정해린(성창기업) 서재필(고려피혁) 정동보(풍산금속센터) 성자경(두산농산) 정진석(오비시그램) 유여걸(남양산업) 최준희(한국건업) 변철희(한효개발) 정태훈(대동공업) 정택기(대한중기) 유석균 (대농건설) 석학진(코오롱건설) 장두섭(동아자동차)씨 등이 눈에 된다.
또 기업의 외부 인사 영입 케이스로는 이한기 전 감사원장이 극동석유 고문으로 간 것을 비롯해 배수곤씨 (전 한은 부총재)가 롯데칠성 사장으로, 안상국씨(전 한은 부총재)가 동서증권 사장으로 갔고 이건중씨(전 조달청장)는 백화양조 사장에서 럭키증권 사장으로 자리를옮겼다.

<박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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