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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우린 중장년층만 채용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서명수 객원기자

울산광역시에 있는 자동차 부품업체 C사. 공업도시 울산에서 발에 차이는 그저 그렇고 그런 중소기업이지만 한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나이 든 중장년층만 근무하고 있어서다. 이 회사 종업원 20여명은 전부 55세 이상이다. 70세 가까운 노인도 있다. 일년 연봉이 평균 2000만원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만 월급이 적다는 불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한 직원은 "남들은 집에서 손자를 본 나이인데, 일자리를 갖고 있다는 게 어디냐"고 말한다. 나이가 많지만 일만큼은 젊은이들 못지 않게 열정을 쏟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벽 일찍 출근해 사무실 청소까지 하는 직원도 있다.

이회사는 중장년 위주의 채용제도를 도입한 후 공장의 생산성이 좋아지고 기업 실적도 향상됐다. 지난 해 10월엔 충남 당진에 제2공장을 신설했다. 여기서도 근로자 전부를 중장년층으로 채웠다.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재교육을 실시한 후 현장에 투입했다. 그러다 보니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도 채용되기도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중장년층 근로자들의 성실성과 경험이 회사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중장년 고용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시니어 근로 능력의 재발견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은퇴 전후의 중장년층이 체력이나 능력 면에서 젊은 세대에 크게 뒤떨어진다고 생각해 왔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지고 이로 인해 판단력이나 문제 해결력에 문제가 생기고 업무에 필요한 역량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자신들 스스로도 나이가 많다며 괜히 위축되고 재취업에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C사의 사례는 이런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C사 말고도 중장년 고용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는 기업도 많다.

올 초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장년 일자리 희망센터가 중소·중견기업 389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중장년 채용인식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기업 10곳 중 8곳은 2012년부터 14년 사이 중장년층을 채용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장년을 채용한 전체 기업의 69.2%는 채용한 중장년이 ‘경영성과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답했다. 그 이유는 중장년이 가진 경험과 노하우 때문이었다.

중장년 근로 능력의 재발견 사례는 해외에선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핀란드 산업보건연구원 산하 국립직업건강연구소는 11년에 걸쳐 45~57세 6300명의 업무 능력을 조사했다. 그 결과 60%가 나이에 관계없이 예전과 다름없는 수준의 근무역량을 보였고, 10%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능력이 향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소는 몇년 뒤 이들의 업무능력을 다시 평가했는데, 52%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직무와 근무 환경을 재조정한 그룹에선 70%이상이 나이에 상관없이 업무역량을 발휘했다.

미국 워싱턴에 고령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미국은퇴자협회(AAPP)라는 곳이 있다. 미국의 친 이스라엘 정책을 유지·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국 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 , 민간인이 총기를 휴대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주 목적인 미국 총기협회(NRA)와 함께 미국 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3대 로비단체 중 하나다. 이 단체는 회원수만 3800만명, 자원봉사자 430만명으로 연 회비 16달러에 생명보험, 자동차 구입, 부동산 보험, 여행 패키지, 건강 검진, 약 배달 서비스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AAPP의 브래들리 셔먼 수석고문은 지난 2013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서울 국제시니어엑스포'에 참석해 "시니어 인력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며 업무전문성과 숙련된 기술, 오랜 세월 축척된 각종 노하우 등 시니어만이 가진 능력을 새로운 가치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BMW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나이 든 근로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제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있다. 나이들었다는 이유로 직원들을 퇴직시키면 유능한 직원을 놓치게 돼 장기적으로 기업의 경쟁력도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하는 사회

베이비 부머의 은퇴가 본격화한 우리나라는 '정년60세 의무화'법안이 시행에 들어감으로써 중장년 고용 시대가 조금씩 열리고 있다. 공공기관과 300인 이상 대기업은 내년부터, 나머지 기업들은 2017년부터 정년 60세가 법으로 의무화된다. 대한항공·한화그룹·LG디스플레이·NH 농협 등 일부 대기업은 수년전부터 퇴직자를 재고용하는 제도를 도입, 시행중이다. 외국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시니어들을 나이가 아닌 실력으로 평가하는 기준에 우리 사회에도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현재의 업무 환경이 젊은 세대에 맞게 디자인돼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이나 생산성은 연령 자체보다 어떻게 업무 환경을 조성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지혜의 깊이가 더해져 내공이 켜켜이 쌓인 세월이다. 열정만 있다면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이들었다고 주눅들지 말고 고개를 들어라.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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