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쉰들러’ 실화소설 선물 … 시진핑, 벨기에 국왕 마음 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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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슈링의 젊은 시절 모습과 그를 소재로 한 소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4일 저녁 베이징을 방문중인 필립 벨기에 국왕을 중난하이 로 초청했다.

중난하이는 중국 최고지도부의 집무 겸 거주 공간이 밀집한 지역이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게슈타포 총구 앞의 중국 여인』이란 제목의 책을 필립 국왕에게 선물했다. 실존 인물인 첸슈링(錢秀玲)을 모델로 한 실화 소설이다. 출간된지 16년이 지난 이 책을 선물한 데는 이유가 있다. 올해가 제2차 세계대전(중국명 반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임을 상기시키고 함께 나치에 맞선 중국과 벨기에 국민의 연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912년 장쑤 성 출신인 첸슈링은 2차 대전 당시 벨기에 루뱅 대학 박사과정에 다녔다. ‘중국의 퀴리 부인’이 되겠다던 화학도 첸이 훗날 ‘중국의 쉰들러’라 불리게 된 건 뜻하지 않은 계기에서 시작됐다. 첸은 어느날 신문에서 벨기에 레지스탕스 대원이 독일군 열차를 폭파하고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기사와 함께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2차대전이 터지기 전 중국에서 군사고문으로 근무하는 동안 첸의 사촌오빠와 절친하게 지내던 독일 장군이 벨기에 주둔군 사령관으로 와 있다는 소식이었다.

 첸은 즉시 구명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고 사령관을 찾아가 설득한 끝에 청년을 구해냈다. 얼마 뒤에는 게슈타포 요원 3명이 살해되자 벨기에 청년 90명이 한꺼번에 체포됐다. 독일군은 하루에 15명씩 차례로 처형키로 했다 .

첸은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을 뚫고 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브뤼셀로 향했다.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사령관은 이국 여성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움직여 청년들을 풀어줬다. 며칠 뒤 사령관은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 본국으로 송환됐다. 2차대전이 끝난 뒤 첸은 벨기에 정부로부터 국가훈장을 받았고 ‘벨기에의 어머니’란 영예로운 칭호도 얻었다. 그가 살던 벨기에 에코신엔 지금도 ‘마담첸’이란 이름의 도로가 있다. 첸을 모델로 한 소설은 중국 국영 CCTV가 16부작 드라마로 방영하기도 했다. 첸을 소재로 대화를 시작한 덕분에 시 주석과 필립 국왕의 만남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필립 국왕은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가 중국의 유럽투자를 위한 가교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도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역사적 인물이나 고사를 정상외교에 활용하는 건 시 주석의 단골 메뉴다. 중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 은인에게 감사를 표명하거나 두 나라가 함께 고난을 헤쳐나간 역사적 사실을 인용함으로써 상대방 국민의 마음을 사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방한 당시엔 서울대 강연에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다”며 한·중 양국의 역사적 인연을 강조했다. 베이징의 한 외교관은 “기념 표지를 설치해 달라고 한국 정부가 요청한 것보다 더 격식을 갖춰 안중근 기념관을 세운 것도 시진핑의 역사외교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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