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왕건군의 광개토왕릉비문 "일군변조설"부정 사료비판안거친 근거없는 주장-재일사학자 이진희씨(명치대강사) 왕씨 저서 신랄히 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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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해 가을부터 일본의 신문·TV각사는 광개토왕릉비에 관한 보도에 열을 올렸는데 그 열기는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것같다. 중공학자가 구일본군참모본부에 의한 비문변조설을 부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문·TV각사가 열을 올리는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것같다. 12년전의 일이다.비문이 참모본부에 의해 변조되었다는 필자의 저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 가 나오자 수많은 일본학자들이 반론에 나섰다.
필자는 제때에 그에 반론을 전개, 논쟁은 3년으로 끝났었다. 그들은 그이상 반론할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일인 수준에 못미쳐>
그런데 11년만에 중공학자가 필자의 변조설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논문을 내놓았으니 그들에게는 근래 맛보지못한 통쾌한 뉴스였던것 같다.
문제를 던진 중공학자란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왕건군소장. 그의 논문이 중공학술잡지 『사회과학전선』에 발표되자 일본 독매신문이 이를 보도, 동지 북경특파원은 길림으로 뛰어 그와의 인터뷰기사를 보냈다.
지난7월초 중공당국이 동북대학일행의 집 (집) 안행을 처음으로 허가하자 일본의 신문·TV 각사는 그들의 귀국을 계기로 대대적인 보도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어 나리따공항에 대기하였다.
7월17일 밤의 일이다. 그러나 중공측은 척본작성은 물론 비문을 판독할수있게 접근해 사진 촬영하는것도 금지했으며 비면을 상세히 검토하려면 사다리가 필요한데 (비높이 6·3m) 그것조차 빌려주지 않았었다.
뿐만아니라 왕건군씨의 저서 『호태왕비의 연구』가 가을에 번역, 출판될때까지 비를 실견한 견해를 발표치않도록 일행에게 요구했던것이다.
보도전이 수포로 돌아간지 11일후인 7월28일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조일신문이 조간의 1면톱기사로 비를 찍은 컬러사진과 2년전에 작성했다는 「최신척본」을 입수했다고 보도하고 왕건군씨의 주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필자는 제1면의 기사와 제3면의관련기사를 읽으면서 조일신문이 이같이 크게 취급한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통례로 보아1면 톱기사로 취급하는것은 일본인이 노벨상을 수상하거나 세계사적인 발견을 했을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군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변조설을 부정한것은 노벨상에 못지않을 정도로 통쾌한 뉴스였던것이다.
필자는 곧 반론하는 글을 보냈는데 (8월30일 석간에 게재) 그 마지막 부문에서 다음과같이 강조하였다.<금년 가을 왕씨의 논문과 동북대학일행의 견해가 책으로 묶어진다는데 한국과 북의 연구자를 포함한 공동조사가 실현되기전에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만으로 조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바란다. 왜냐하면 광개토왕릉비문은 명치이래 조선침략과 식민지지배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데 이용되었으며 오늘도 그 여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왕건군씨의 『호태왕비의 연구』 (B5판·2백40페이지)가 12월10일에 간행.
신문·TV는 지난6일 그의 출판예고까지 뉴스로 보도하였고 독매신문과 조일신문은 그간 왕씨를 초대하여 심포지엄을 열것을 계획, 독매신문사가 그를 실현케 되었다. 날짜는 내년1월11·12일의 양일. 중공측에서 왕씨등 3명, 일본측에서 5명, 그외에 필자도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에참가한다. 변조설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이 전개될 것이다.
왕씨의 저서를 읽어보고 첫째로 느낀점은 그는 현지조사를 독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변조설부정에 성공하지못했다는 것이다. 우선 그의 변조설비판은 지난시기 일본인 연구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며 청말민국초 중국인학자가 남긴 문헌에 대한 사료비판도 되지못했다는것을 지적해 둔다.
예컨대 비가 언제 발견되었는가를 추구하는 것은 비연구사의 과정을 밝히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데 동치말년 (1874) 설· 광서원년 (1875) 설· 광서2년설· 광서6년설등으로 구구했었고 일본서는 지내굉의 광서2년 (1876) 설이 통설로 돼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측 문헌에 대한 사료비판을 통해 비는 광서6년(1880) 에 농민들이 개간중에 발견, 이듬해 회인현지사 장포의 부하인 관월산이 그를 확인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밝혔었다.
그런데 왕씨는 관월산과 만난 일이 있는 담국환의 서술 (수찰)을 무비판적으로 믿고 관월산이 「호태왕비를 발견한것은 늦어도 광서초년」이라고 단정하였다.
왕씨는 필자의 저서를 주의깊게 읽지않았기 때문에 이같이 착오하게 되었는데 장월이 회인현 설치위창으로 임명된것은 광서3년이며 (『봉천통지』등) 따라서 장월과 행동을 같이한 관월산이 광서3년 이전에 비를 발견할수는 없는것이다.
따라서 척공이 광서초년에 비면의 태를 닦아냈다는 왕씨의 주장도 근거를 상실했으며 동치말년설·광서2연설도 성립될수 없는 것이다.
또한 영희에 의해 1882년 (광서8년)에 척본이 작성되었다고 보는 왕씨의 견해도 사료비판이 엄격치 못한데 기인한다. 영희라는 자는「난언」 속에서 비 발견자는 순검이였던 왕위장이었으나 석문을 작성안했기 때문에 변단산을 보내 1882년에 척본을 만들었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봉천통지』나 『관전현지략』등으로 그들의 경력을 조사해보면 광서8년 혹은 그 이전에 왕위장이 회인현의 순검을 한 적은 없으며 (광서28년에 부임) 영희와 왕언장이 처음으로 만난것은 「난언」 서술의 4개월전인 1903년8월이었다.

<비문 재현사실 몰라>
왕건군씨는 「난언」에 의거하여 1882년 초척본이 나왔다고한 지내굉의 주장에 현혹된 모양이다.
왕씨가 범한 치명적 오류는 1899∼1900년에 비전면에 석회를 칠해 그위에 「비문」 이 재현된 사실을 정확히 인식못한데 있다. 그는 척공이 탁본을 쉽게 만들기 위해 1902년경부터 부분적으로 석회를 칠해 1907년경에 완성했다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20세기초엽이 되어 비문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 종래의 방법으로는 수요에 응할수 없게되어 초천부 (척공) 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비문사이에 석회를 바르니 탁본작성이 간단해졌으며 4일만에 비문의 탁본1조가 완성되고 문자도 선명했으므로 고가로 팔수 있었다.>
그러나 비전면에 한꺼번에 석회를 칠한것은 내등사진에 뚜렷하며 그 시기 현지서는 탁본이 매매의 대상으로 되지 않았었다. 예컨대 1907년5월 비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현지에 간 소택대좌에게 집안현지사는 비판매를 거부하고 탁본을 원한다면 후일에 떠서 보내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때 탁본이 매매되고 있었다면 소택은 자유로이 살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지사가 그렇게 말할리 없는것이다. 따라서 1900년 전후시기에 척공이 상차 자획이 명확한 탁본이 고가로 팔릴것을 예견하여 석회를 칠한다는 것은 사실상 있을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척공의 손자가 조부로부터 일본군이 「우회도부」 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는 말, 즉 간접적 증언으로 일본측의 석회도부를 척부하는것도 유효치 못하다.
우회도부는 주구의 비문변조를 은페하기 위해 일참모본부가 한 것이다. 직접 손질한 것은 돈을 받은 척공 또는 변장한 일본군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우회도부의 시기및 범인에 대해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변호여부 논쟁 예상>
이번 심포지엄의 최대 초점은 「임나일본부」실의 근거로 이용된 「왜이신묘년내도해파백잔□□□나이위신민」의 구절이다. 지난 시기 일본학계는 이 구절을 「왜가 신묘년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제) 과 □□, 신나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 비문상의 「왜」 를 야마또(대화) 정권으로 보아 4세기후반의 한반도침략과 가야지방의 지배는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주장했었다.
필자는 수십종의 탁본과 사진을 검토하여 「도해파」의 「해」자는 석회가 박락되기 시작하면 「해」자 아닌 다른글자 (판독불능) 로 되며 「도」「파」자도 원비문이라는 증거가 희박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왕씨는 「이 3문자는 석비에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도해파」 가 명확한 탁본 (1981년 작성) 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 수록된 컬러사진에는 1935년경의 수곡척본과 비슷한 비면과 「해」 자 아닌 글자가 찍혀있고 「파」자도 명확치 못하다.
따라서 왕씨는 잘못 판독했고 1981년 작성이라는 탁본은 후에 가묵하여 뚜렷한 글자를 만들어낸것임에 틀림없다. 종래 탁본에 선명치 못했던 비문 (도판) 이 뒤에 갑자기 명확해질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왕건군씨가 의거한 자료는 주로 필자의 『광개토왕능비의 연구』와 「사에끼」 (좌백유청)씨의 『연구사 광개토왕릉비』, 일본학자들의 변조설 비판논문인데 시기가 다른 여러가지 탁본을 비교검토한것이 아니다. 그는 사료를 다루는데 치밀치 못하며 비 발견해와 초척출년·우회도부문제등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별 논거없이 일본학자의 견해에 따르고 있다.
제5장의 「비문의 고증과 해석」에는 참고로되는 견해가 있으며 비문의 「왜」를 북구주의 해적집단으로보는 것은 주목된다. 즉 「임나일본부」세에는 동조하지 않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수준이 낮으며 비문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는 연구로는 되지못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광개토왕비를 중심으로 지난 시기의 한일관계사 왜곡문제가 크게 논의될것이며, 또한 비문 변조여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관계국 연구자의 공동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보게될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심포지엄은 큰 의의가있다고 필자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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