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6) - 30년대의 문화계(1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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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기서 독자들의 빈번한 질의에 대해 응답할 필요를 느끼는데, 그 질의란 어째서 그 당시에는 작가나 화가·신문기자·교원등 소위 문화인들이 술타령만 하였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술타령 이야기률 써온 나부터 술이야기가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니까 독자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이가 50세이하의 사람들은 나라를 가졌다는 것, 버젓하게 내세울수 있는 제 나라를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집에서는 우리나라라고 하면 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와가 구너」 (재국)라고하면 조선이 아니라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 되므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하고 어리둥절하였다.
어머님의 설명으로 우리나라는 일본한테 빼앗겨 없어졌고 일본을 우리나라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차차 나이가 먹고 커짐에 따라 나라가 없는 것이 얼마나 분하고 원통한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때 일본사람은 우리네를 「요보」 (우리들이 남을 부를 때 쓰는「여보」에서 나온 것) ,또는 「센진」(죠오센진<조선인>을 멸시해 쓰는 말)이라고 불러 업신여기고 저희들의 노예같이 취급했다. 모든 일에 저희들이 주인이고 우리네는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문제없다고 알아 왔다.
그 차별대우란 말할 수도 없으니, 같은 직원으로 월급부터 저희들은 갑절 더 받고, 조선사람은 저희들의 반밖에 안주면서 저희들은 주임·과외이고 조선사람은 그 아래에서 일만 죽도톡 해야했다. 서울거리도 저희들 사는 곳이 서울의 메인 스트리트인 본정통이고 조선사람이 많이 사는 북촌은 시설이 말할수 없이 초라하였다.
이렇게 당하는 일, 보는 것, 듣는 것이 한결같이 분통이 터지는 일들뿐이므로 화가 치밀어 견딜수 없었다. 더구나 공부를 했다는 지식인들, 문화인이란 사람들은 너무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므로 이런 것에 더 견딜 수 없었다. 예술가라는 문화인들은 더구나 감각이 예민하므로 이런 아니꾜운 글을 제 정신으로 볼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모이면 자연히 술을 마실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술을 마시면서 서로 넋두리라도 하고 분풀이도 하고 떠들어대 울분을 발산이라도 해야했다. 이것은 결단코 술을 마시는 핑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는 다방이라는 것이 없었고, 친구끼리 모여 앉아 이야기할수 있는 곳은 술집밖에 없었으므로 친구를 만나면 가는 곳은 술집밖에 없었다.
이래서 글을 쓰는 문인이라는 사람들, 신문기자로 관청·경찰서·재판소를 드나드는 사람들, 학교에서 교사일을 하는 사람들, 이런 문화인이라는 사람들은 술로 나라를 잃은 망국민으로서의 시름을 달래기도 하고 잊을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우리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쇠사슬에서 풀려 해방되었는데, 그때 우리들은 머리를 짓누르던 어떤 무거운 압력에서 벗어 나온것 같은 그런 해방감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지금 나이가 적어도 60세이상 된사람은 모두 느꼈을 것이고 그 아래 나이의 사람들은 이런 해방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해방후 출생한 젊은 40대의 행복한 사람들은 나라는 으례 있는 것으로 알고 나라를 잃은 설움을 모른다.
앞서 정지용을 이야기하던 대목에서 그가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하는 자작시를 낭송하고 통곡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의 문화인들의 심정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은 우리들이 왜 술타령을 하였는가를 모를것이다.
이것이 그때 문화인들이 술타령을 한 까닭이었음을 양해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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