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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낯선 땅에서 마주친 分身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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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살집 좋게 생긴 여성들이 전시장을 그득 채웠다. 팔뚝이며 다리통이 퉁퉁하고 몸집도 푸근하다. 흰 치마를 입은 그들 얼굴이 자매처럼 닮았다.

서넛씩 무리를 지어 선 아줌마들은 고개를 빼고 어딘가를 바라보거나 팔을 들어 흔들고 있다. 머리를 갸웃해 뭔가 생각에 잠긴 이들에게선 살포시 슬픈 기운이 떠돌기도 한다. 서울 관훈동 가람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한애규 작품전'은 '여행'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삶의 마취에서 잠시 깨어나 길을 떠난다… 곳곳에 삶의 아우성들이 있다. 걸인들조차 자신의 본분에 열중하며 생명을 만끽하고 있다. 모두들 그들만의 중독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도예가 한애규(50)씨가 도록에 담은 글은 지난해 친구들과 다녀온 여행기이자 이번 전시를 이루고 있는 이야기다. 이스탄불.그리스 시칠리아에서 만난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 작가는 쓴다. "세상의 구경꾼이 되어 기웃거린다.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삶들을 기웃거린다. 요동치는 삶들, 지나간 삶의 흔적들,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

붉은 점토 속에서 꿈틀거리는 살갗 밑으로 쓸쓸함이 흘러간다. 작가는 손가락에서 피가 나게 수백 수천 번 흙을 밀어붙이며 낯선 땅에서 새삼 조우한 자신의 모습을 빚었다. '여행'이란 단어 밑에 붙은 '엿보기' '교감' '다시 내게로' 같은 부제는 이제 오십 줄에 들어선 한 인간의 고백록 같다.

천년 전 어느 석공이 일생 동안 다듬어 만들었을 성당 벽 조각상 얼굴에서 석공의 표정을 본 작가는 "돌 깨는 저들과 내가 뭐가 다른가" 울컥 서러워 당장 점토 한 덩어리를 사서 주물럭거렸다고 했다.

잠시도 손을 쉴 수 없는 그에게 석공의 피가 흘러내린다. 옛 문명의 폐허에 선 저잣거리를 헤매며 옛날 사람들을 떠올린 그는 " 내 삶의 터전도 폐허가 되어있을 그 어느 날의 모습"을 생각하며 "역사란 이런 것을 말하나 보다"고 중얼거렸다.

한애규씨는 1984년 첫 개인전 이래 지난 20년을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점토(테라코타) 작업에 매달려 왔다. 그가 빚은 여체는 생산과 노동으로 팽팽했으나, 가부장제에 눌린 여심은 새 세상을 갈구하는 부르짖음으로 가득했다.

그 몸짓 속에 피어나는 평등 세상에 대한 갈망이 너무 절실해 작가는 때로 절망했다. 한국 여자들의 맵고 쓰린 일상을 일기처럼 표현한 그는 "새로운 모계사회를 꿈꾸는 나는 몽상가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여행'에서 그 질문은 세상과 역사와의 교감으로 더 깊어진 듯 보인다.

고된 세상살이를 헤쳐 가는 그의 여성상을 미술평론가 박영택씨는 "부드러운 비애와 함께 하는 건강한 현실 인식의 힘, 자기성찰과 낙관, 시간이 지나며 축적된 삶을 보는 단단한 시선"이라고 설명한다. 17일까지. 02-732-6170.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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