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5)-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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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런 어려운 고비에 방응모가 나타나서 30만원 일시불입의 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경영난으로 가시밭길을 걸어오던 조선일보는 비로소 새주인을 만나 사운이 반석위에 서게되었다.
방응모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근검 성실한 사람이었다. 정주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한문을 많이 배웠다. 젊어서 여러가지 사업에 손을댔고 한때는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기도하였다.
신문대금을 제때에 보내지 못하여 곤경에 처한 때도 있었는데, 모든 사업의 근본은 재력이라는 것을 깨닫고 삭주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금광을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8년동안을 악전고투한 결과 드디어 큰 광맥을 발견하여 일약 거부가 되었다.
이 금광을 판 돈으로 조선일보의 경영에 나서서 우선 향당의 선배인 조만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겸 전무로 앉았다. 얼마안가서 조사장이 퇴진하자 방응모가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경영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이광수가 부사장이 되고 경제부장이던 서춘이 주필이 되어서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고 이어서 이광수의 연재소설 『유정』이 9월부터 시작되었다.
1935년에는 3월에 창간15주년을 맞이하였고, 7월에는 대평로에 신축중인 신사옥이 낙성되어서 이 낙성식을 내빈 4천5백명의 참석아래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렇게 방사장의 영도아래 사운이 융창의 일로를 걸어가다가 1940년에 이르러 총독부의 강압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8월에 폐간되었다.
한편 중외일보는 1931년에 해산 폐간된 후 그해 10월에 김찬성에게 중앙일보의 발행허가가 나와서 견지동에 있는 신사옥에서 11월부터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노정일이 사장에 취임하고 편집국장 강매, 영업국장 김찬성, 사회부장 박팔양, 경제부장 배성룡, 지방부장 유광렬,학예부장 박영희의 진용으로 출발하였으나 몇달이 못가서 경영난으로 1932년 5월에 휴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다시 재력있는 새 경영자를 물색하던 중 개성 출신으로 조선일보에 투자하였던 최선익과 논산의 부호 윤희중 양인의 출자를 얻어서 노정일로부터 판권을 인계 받았다. 1932년 10월부터 속간 하였는데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사장겸주간 최선익, 전무 윤희중, 편집국장 김동성, 차장 염상섭, 주필 이관구
이렇게 시작해서 중앙일보를 발행해 갔었는데 마침 여운형이 1932년3월에 출옥했으므로 그를 사장으로 영입하고 신문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쳤다. 이를 계기로 이 신문은 점차 활기를 띠어서 4면제를 6면제로 늘리고 또 다시 1936년에는 조석간 12면제로 확장하였다.
1936년 8월, 동아일보에서 일장기말살사건이 터졌을 때 조선중앙일보도 역시 운동부기자 유해붕이 일장기를 말살하였으나 발각되지 않아서 관망중 발각되기전에 자수하는 것이 죄를 받아도 가벼우리라는 판단아래 유기자를 경찰에 자수시키고 신문도 9월5일부터 자진휴간하였다.
그뒤에 조선중앙일보는 대주주사이에 대립 암투가 생기고 여운형사장도 사임함에 이르러 사의 존폐가 염려되었었는데 동아일보가 1937년 6월에 정간이 해제된뒤에도 조선중앙일보는 해결책이 서지않아서 사원들이 초조히 기다렸으나 소생할 가망이 없이 1937년 11월에 발행권이 취소되어 조선중앙일보는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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