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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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점들은 요즘 유난히 화사하다. 여성잡지들이 송년호 부록으로 발간한 가계부들. 어느새 신춘의 향기를 느낄수 있다.
세모의 문턱에서 흔히 상티망(감상)에 젖기 쉬운 사람들에게 여성잡지는 무슨 기쁨의 메시지라도 전하는것 같다. 가계부는 한 가정의 새해 포부를 담을 그릇이다.
사실 60년대, 70년대와 같은 인플레이션시대엔 아무리 화사한 가계부라도 주부들에겐 난낱 구박덩어리일 뿐이였다. 가계의 수입이 올라본들 지출을 감당할수 없었다. 기장이 무색하다.
그러나 물가가 안정된 시대야말로 가계부는 희망의 기록도 되고, 기쁨의 메시지도 될수 있다.
가계부는 단순히 돈의 행방을 적어놓는 잡기장이 아니라 생활의 설계도여야 한다.
가정도 엄연히 한 경제단위다. 따라서 수입과 지출엔 절도가 있어야하고, 당연히 적자는 없어야한다. 그것은 한 나라의 재정이나 한 기업의 경영이나 꼭 마찬가지다.
적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요인이 분석되어야하고, 그것을 흑자로 만드는 노력과 궁리가 앞서야한다.
가계부의 비목을 보면 재미있게 분류되어 있다. 소비지출에 식료비, 주거비, 광열비, 피복비, 교육비, 잡비의 항목이 있다. 맨끝엔 교제비 항목까지 따로 있어서 경조비가 기록된다.
이런 식의 비목 분류는 지출을 체계화하고 절도를 갖게 한다.
원래 장부는 바빌론 사람들이 발명했다. 기원전 30세기께 세계 최대의 번영을 이룩했던 바빌론 사람들은 벌써 그때부터 수입과 지출을 합리적으로 관리했다. 그것이 바로 번영의 열쇠였는지도 모른다.
그후 고대 로마인도, 고대 그리스인도 모두 장부를 기록했던 흔적들을 남겨 놓았다. 로마나 그리스 역시 그 시대 번영의 심벌이었다. 그들의 부기는 14세기에 이르러 복식부기로 발달했다. 이것은 고도의 경영술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복식 부기를 특히 이탈리아의 가장 번화한 상권 제노바의 상인들이 궁리해낸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기업이나 가계나 흑자의 첫째 요건은 돈의 씀씀이를 올바르게 하는 일이다.
아마 모든 가정들이 가계부를 적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인플레를 한결 잠들수 있게 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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