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 위험사회, 안보의 패러다임을 바꾸자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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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

세계적 석학인 올리히 벡이 "위험사회"를 출간한 지 올해로 30년이 지났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산업화시대를 열었고 세상은 풍요로워졌지만, 새로운 위험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은 주로 선진국에서 나타나는데, 특별한 상황을 전제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발생하는 위험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반세기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GDP 세계 13위, 휴대폰 시장점유율 세계 1위, 조선수주량 세계 1위, 반도체시장점유율 세계 3위, 자동차 및 석유화학 생산량 세계 5위를 달리는 선진국이다.
반면에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노인자살률 1위, 청소년자살률 1위, 사교육비지출 1위, 보행자 교통사고 1위, 주당근로시간 1위, 저출산률 1위, 조세불평등 개선지수는 꼴지다. 잘살게 되었지만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를 시작으로 이듬해 삼풍백화점 붕괴, 최근엔 세월호 침몰사고, 예비군훈련장 총기사고, 메르스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일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최근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서 '우리 일상에 가장 위협이 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소득불평등 및 일자리 등의 문제'라는 응답이 40%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 '환경파괴 및 대기오염 등의 문제'(21%), '메르스와 같은 전염병 등의 문제'(15%), '교통사고 및 생활안전 등의 문제'(10%), '북한의 도발 및 핵보유 등의 문제'(9%)순으로 나타났다.
삶의 체감이 강하고 일상적인 위험일수록 응답률을 높았다. 그 중에서도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이지만, 개인노력보다는 사회구조적 노력이 필요한 위험일수록 응답률이 높았다. 탈근대적 과제들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1994년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에서 '인간안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전통적인 국가안보개념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생명과 존엄을 중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안보개념이다. 다시 말해 전쟁과 분쟁 등의 폭력뿐만 아니라 기아, 빈곤, 환경파괴, 생명무시, 불평등, 경제위기 등 개개인의 상황에서 다양하게 벌어지는 문제를 21세기 새로운 안보의 영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분단과 군사적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대한민국으로선 전통적 국가안보가 매우 중요하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수호하고 국민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안보는 튼튼한 국가안보의 선행정책이자 예방정책의 기능을 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던가.

한국형 인간안보 정책은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도시안전, 사회안정, 계층건강이다. 도시안전 정책의 핵심은 안전한 이동, 안전한 학교, 안전한 음식, 생명과 자연의 공존 등이다. 사회안정 정책의 핵심은 복지, 일자리, 주거, 교육, 공동체 가치 등이다. 계층건강 정책의 핵심은 청소년 건강, 어르신 건강, 여성 건강, 질병통제, 공공의료 등이다.

안보정책은 보수의 대표정책이자 박근혜 정부가 가장 중시하는 정책 중 하나이고,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는 슬로건의 주제를 '사람'으로 잡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간안보는 보수 진보 모두에게 블루오션이다.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다. 누구든 먼저 안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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