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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잊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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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나는 당신이 지난여름에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혹시 그대가 불리한 것은 빨리 잊는 편리한 기억력을 갖고 있을지 몰라 회상의 단초들을 제공해 본다.

 2014년 8월 3일 무더운 날이었다. 뜬금없이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덕성여대’와 ‘에볼라’가 등장했다. 당신들이 청와대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덕성여대 행사를 취소시켜 달라’는 취지의 글을 속속 올렸기 때문이었다. ‘살려주세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대통령님 국민들에게 귀 기울여 주세요’ ‘공항을 막아주세요’ 등의 제목이 달려 있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다음날 개막하는 ‘차세대 여성 글로벌 파트너십 세계대회’의 참가자 약 500명에 30명 안팎의 아프리카 대학생이 포함돼 있었고, 그대들은 이를 국가적 중대 사태로 간주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에볼라 환자가 나오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 행사를 주최한 덕성여대가 에볼라 발병국인 기니·라이베리아·시에라리온 3개국에서는 학생들이 오지 않는다고 해명했지만 ‘오만과 편견’에 휩싸인 당신들은 막무가내였다. ‘아프리카 학생=전염병 유발자’라는 공식을 마구 퍼뜨렸다.

 나이지리아 학생 세 명에 대한 초청이 취소됐고, 총 28명의 아프리카 학생이 행사에 참여했다. 그 전 달에 그 나라에서 한 명의 에볼라 감염 사망자가 생긴 것이 문제였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약 1억8000만 명이다. 인구 5000만 명의 한국에서는 17일까지 스무 명이 메르스로 숨졌다.

 논란에 지친 덕성여대는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의 숙소를 한 곳으로 몰았다. 그곳에서는 1회용 식기가 쓰였다. 방송 카메라는 줄곧 아프리카 학생들을 쫓아다녔다.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는 모양새였다. 짐바브웨에서 온 학생이 참다못해 “에볼라 발병 3개국에서 짐바브웨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고 따졌다. 그 거리는 약 5000㎞다. 한국에서 베트남까지보다도 멀다.

 홍콩과 중국 본토의 대학들이 ‘메르스 2위’의 나라 한국에서 오는 학생들의 계절학기 프로그램 등록을 취소시켰다. 당분간 교환학생도 받지 않을 태세다. 며칠 전 회사 선배는 출국 직전에 중국 정부 측으로부터 “지금은 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공항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계획된 출장이었다. 아프리카 학생 방한에 반대했던 그대들도 이런 처사가 부당하다고 느끼는가. 만약 그렇다면 ‘인지부조화’가 중증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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