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명치언론, 한국을 「속국」시"-「한일 커뮤니케이션」심포지엄 김정기교수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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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학자들은 오늘날 일본언론의 대한보도태도는 한일합방전 명치 일본신문들이 본격적으로 대한보도 활동을 전개한데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점에서 한국 외국어대 국제커퓨니케이션연구소가 지난달 30일 「명치 일본언론의 대한관」을 주제로 연 한일 국제커뮤니케이션 심포지엄은 큰 관심을 끌었다.
이날 김정기교수(외대)는 특히 갑신정변 1백주년을 맞아 명치일본신문들의 대한보도에서 조선말기 대표적 엘리트 청년이자 개혁정치가인 김옥균이 특별히 주목을 끌었던 점에 착안, 그에 관한 보도내용을 분석함으로써 명치일본 언론의 대한관을 추출했다.
명치일본신문은 1882년3월 김옥균이 처음 일본을 방문한 이래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망명, 소서원도에서의 억류생활, 그리고 l894년 상해에서의 극적인 암살에 이르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드라머를 뉴스의 초점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명치신문의 김옥균 보도는 김옥균을 「일본의 친구」「일본당의 영수」, 마침내는 「일본인」그 자체로 묘사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의 김옥균은 부정되고 있다. 독자성이 부정되는 김옥균상이 담고있는 한국상은 일본과 대등한 지위에 있는 독립국이 아니라 열등한 위치의 예속국으로 나타난다.
명치신문은 김옥균파를 곧 잘 「독립당」이라 표현하고 있으나 그 독립은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이지 결코 일본과의 대등을 의미하지 않음은 전체언론의 문맥에서 뚜렷하다.
그러면 당시 명치신문의 대한론은 어떤 것인가.
김교수는 당대의 지도적 사상가요 교육자이며, 선구적 언론인으로 일컬어지는 「후꾸자와·유끼찌」(복택유길)가 그의 「시사신보」를 통해 주장한 대한론을 통해 이를 추적했다.
복택이 내세운 조선의 개화·문명화론은 임오군난 후에 한 허물을 벗고 일본에 의한 조선의 보호국화의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실패후에는 마침내 적나라한 조선의 일본화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1885년 3월 「시사신보」사설을 통해 발표한 복택의 유명한 탈아론은 「오늘을 꾸리는데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는 없다』며 『악지와 친하게 지내면 악명을 면키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웃 나라이기에 잘 보아주기 보다는 서양인들처럼 이들을 처리 (정복·분할)해야한다』면서 조선을 정복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복택의 조선문명화론에서 볼때 김옥균은 「일본의 친구」로서의 조선인이며 조선문명화, 즉 일본에 의한 조선의 보호국화라는 조선정략의 행동대원인 셈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후 김옥균의 세력이 조선에서 여지없이 궤멸됨을 목격한 복택은 그의 조선정략의 행동대원 김옥균의 역할을 부정한다.
김옥균이 탈아론적 정한론의 실천인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상해에서 암살당한 이후다. l5개 일본신문들은 합동으로 그의 죽음에 대해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대대적인 애도 캠페인을 벌이면서 탈아론적 여론을 이끌었던 것이다.
김교수는 『김옥균은 죽어서 탈아론의 실천자가 돼 일본의 조선침공의 첨병으로 이용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김옥균상에 투영된 일본화한 한국상은 명치일본언론의 대한관의 한계였다고 주장했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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