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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규제’ 그만두겠다지만 문제는 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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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해 5월 최수현 당시 금융감독원장이 한 행사에 참석해 “자동차 보험료 인상은 시기상조이며 손해보험사들이 자구노력을 더 해야 한다”고 밝혔다. 자동차보험 손해율이 올라가면서 보험료를 인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나온 발언이었다. 업계는 사실상 당국의 ‘구두지시’로 받아들였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말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만들었다. KB금융 내분사태 등으로 지배구조 개선 목소리가 높아지자 내놓은 대책이었다. 강제력이 없는 모범규준(best practice)이라지만 거의 모든 금융사가 따랐다. 막강한 규제권한을 쥔 당국이 제정을 주도한데다 준수 여부를 챙기겠다고 공언하면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금융권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모범규준은 현재 50개가 넘는다.

 법에 근거가 없는 구두지도, 모범규준, 가이드라인. 15일 금융위원회는 이런 비공식 행정지도를 남발하는 관행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이날 처음 열린 금융규제개혁 추진회의를 통해서다. 특히 금융회사의 가격·수수료, 배당같은 경영판단 사항에 당국이 법적 근거도 없이 개입하는 것도 통제하겠다고 밝혔다. 규제 전수 조사를 벌여 법적 근거가 없는 규제는 일괄 폐지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근거를 만들기로 했다. 새로운 규제를 만들 때는 시한을 의무적으로 설정하고, ‘규제비용 총량제’를 도입해 남발을 막을 계획이다. 금융위는 내규 성격인 ‘금융규제 운영규정’을 마련해 이같은 원칙과 절차를 담을 예정이다. 손병두 금융정책국장은 “금융위·금감원이 규정을 위반할 때는 적절한 조치를 한다는 내용도 포함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가 이런 방안을 내놓은 건 규제개혁 조치의 현장 체감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날 회의에서 “그간의 규제 개선 노력에도 실무자의 ‘통제받지 않은 권력’, ‘그림자 규제” 탓에 현장에선 여전히 힘들다는 소리를 직접 듣고 있다”고 말했다. 법에는 당국에 사후 신고나 보고하도록 돼 있는 사안을 실제로는 반드시 사전협의하고 동의를 받도록 하거나, 법적 근거도 없이 금융상품을 출시해도 되는지 건건히 당국이 심사하는 관행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됐다.

 성대규 전 금융위원회 국장은 “금융규제의 핵(核)이자 백미(白眉)가 감독당국의 비공식적 행정지도”라면서 “입법부의 통제도, 규제개혁심의위원회의 심의도 받지 않는데다 법적 책임도 따르지 않아 남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과장, 보험과장 등을 거친 그는 최근 금융규제의 문제와 개선방안을 담은『그림자 금융규제』라는 책을 냈다. 성 전 국장은 “그림자 금융규제가 금융권 보신주의의 큰 원인”이라면서 “어디에 무슨 규제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금융회사들이 새로운 사업에 손대기를 꺼려한다”고 지적했다.

 당국이 마련하는 금융규제 운영규정은 정치권과 여론으로부터의 ‘방패막이’ 성격도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비공식적 행정지도가 남발되는 건 금융당국의 ‘완력 과시’만이 아니라 정치권 등으로부터 나오는 수수료 인하 요구 등에 밀려서 어쩔수 없이 개입하는 측면도 있다”면서 “명시적인 규정을 마련해 스스로 족쇄를 채우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언만으로 수십년 지속된 관행이 하루아침에 바뀌긴 어렵다는 지적이다. 성 전 국장은 “금융당국의 개혁 드라이브에 기대감을 갖는 한편으로 수장이 바뀌면 어떻게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업계 일각에 남아 있다”면서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내부 규정보다는 강제력이 있는 ‘금융규제혁신법’ 제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규제개혁이 금융산업 경쟁력 제고라는 성과로 이어지려면 업계 스스로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은 “금융권이 규제 탓만 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도 있었다”면서 “자율에 걸맞는 혁신과 경쟁이 따르지 않으면 업계도 후진성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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