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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의 요즘 웰빙가에선] 비만은 사회적 질병

중앙일보

입력

“제가 게을러서 그래요. 먹고 살기가 바빠서요. 죄송합니다.”

살을 빼야 혈압이나 혈당 조절이 용이하다고 말하면 환자들은 대개 이렇게 답한다. 비만은 게으름의 결과물일까. 비만의 기본 기전은 에너지 섭취와 소모의 불균형 탓으로 남은 에너지가 지방으로 저장되는 것이다. 식욕·포만감 등은 각종 신경전달 물질이나 호르몬을 통해 뇌와 지방세포·위장관·근육 등이 신호를 주고받으며 복잡하게 작용해 일어난다. 그런데 고당질·고지방 식사, 스트레스, 수면 부족, 체지방 과다 등이 다양하게 얽혀 있는 균형을 깬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기전 외에 비만 요인으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사회·환경적 요인이다. 경제 수준이 높아질수록 소득 수준이 낮은 집단에서 비만이 더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운동이나 식사 조절을 하며 건강에 신경 쓴다. 반면 소득 수준이 낮은 이들은 지방·당분이 많은 패스트푸드 같은 음식을 더 많이 먹게 된다. 이들의 집 주변엔 녹지나 운동 공간이 별로 없어 신체 활동도 적을 수밖에 없다.
국가 연구 과제를 하며 만난 고도비만 아이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부모가 아침 일찍 일을 나가면서 해두고 간 어른 세끼 분량의 밥과 찌개는 저녁이면 바닥이 난다. 부모의 관심에 대한 허기는 음식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아이들의 손에선 과자가 떨어지지 않았다. 집 밖을 나가면 바로 큰 차가 다니는 길이거나 좁은 골목길이다.

소득 수준만이 문제는 아니다. 체중 조절이 필요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는 “식단을 짜서 음식 해주고 헬스클럽에서 개인 트레이너도 붙여줬는데 왜 살이 안 빠지는지 모르겠다”며 아이를 타박했다. 하지만 방과 후 여러 학원을 다니다가 12시 가까이 귀가하고, 숙제를 하느라 새벽 1시에 겨우 잠자리에 드는 아이의 일과를 보면 답이 나온다. 이 아이에게 운동은 학원 수업과 다를 바 없고, 헬스클럽의 트레이너는 자신을 관리하는 학원 선생님 중 한명일 뿐이다. 어쩌면 그 아이에겐 의사 역시 한 명 더 늘어난 잔소리꾼에 불과할 수 있다. 짧은 수면 시간과 과도한 스트레스가 아이를 살찌게 한 것이다.

비만은 게으름 탓도, 부모의 과도한 관심이나 무관심 탓도 아니다. 생리적 기전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힌 개인·가정·사회·국가 모두의 문제다. 진료실에서 소아청소년·저소득층·장애인 비만 환자를 만날 때마다 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비만은 생활습관 교정과 약물 치료 혹은 수술적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다. 동시에 의료 제도나 사회적 안전망, 국가 정책이 유기적으로 뒷받침해 극복해야 하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박경희 한림대 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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