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8 정상회담 폐막] 에비앙에서 바라본 국제 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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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프랑스 에비앙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은 한마디로 미국을 위한 잔치였다. G8이 세계에서 가장 힘있는 여덟개 나라의 모임이라고는 하지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앞에서 나머지 7개국 정상들은 너무나 왜소해 보였다.

3주 만에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몰아낸 뒤 전쟁을 가장 반대했던 프랑스 땅을 밟은 부시 대통령은 전용 헬기에서 내릴 때부터 그야말로 개선장군 같은 모습이었다.

이번 회담이 중국.브라질.인도 등 11개 개발도상국과 스위스를 포함해 20개국으로 확대된 사상 최대 규모였지만 그보다 부시 대통령의 개별 정상회담에 관심이 쏠린 것도 그 때문이다.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단연 미국-프랑스 정상회담이었다. 시라크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의 비공식 개별회담 시간을 30분이나(?) 얻어냄으로써 부시 대통령의 화해 의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을 맞는 그의 태도에서 유엔 안보리 거부권이라는 히든카드를 휘두르며 전쟁에 반대하던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개별회담을 마친 뒤 양국 정상은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또다시 친구가 됐다는 사실을 과시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시라크 대통령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면 시라크는 친구 아들 부시의 어깨에 손가락을 가볍게 올려놨을 뿐이었다.

반전 진영에 섰던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캐나다의 장 크레티앵 총리, 스위스의 파스칼 쿠슈팽 대통령 역시 부시 대통령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관용은 역시 힘센 자의 몫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재진을 향해 "우리 사이에 이견(disagreement)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 서로가 마음에 안 드는(disagreeable) 사이가 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말했다.

유럽 지도자들이 숨쉬기가 좀 편해졌음은 물론이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역시 부시 주연의 이번 회담에서 낮은 목소리로 일관했다.

부시 대통령의 관용은 공짜가 아니었다. 장거리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에 히스테리적 증세를 보이는 미국은 그러한 무기들의 수출과 확산을 막을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하길 바랐고 그것을 G8 지도자들에게 요구했다.

G8 정상들은 구체적으로 미국이 이제는 위험이 제거된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한 북한과 이란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대량살상무기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이에 답했다. 미국과 유럽의 화해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결국 이번 G8 회담이 재확인한 것은 힘을 바탕으로 하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유럽은 미국이 원하는 조건 아래서만 미국에 환영받을 뿐이다. 또 앞으로 한동안 제2의 프랑스는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에비앙=이훈범 특파원

<사진 설명 전문>
로마노 프로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좌로부터).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콘스탄티노스 시미티스 그리스 총리 등이 3일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리고 있는 G8 회담장에 들어가며 담소를 하고 있다. [에비앙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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