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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선집에 그림 거저 준 해외 여성화가들,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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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국 여성 화가 지지 밀스의 작품 ‘어두운 풍경 속 세탁’ 60×50cm 천에 오일. [사진 지지 밀스]

지난달 중순 자신의 생애 첫 시선집 『그녀에게』(예경)를 받아든 나희덕(49·사진) 시인은 곧바로 시선집에 실린 그림을 그린 외국의 여성화가 네 명에게 영문 감사 편지를 보냈다.

 “아름다운 작품을 건네주신 덕분에 이 책이 잘 완성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우정과 연대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서로의 시와 그림을 통해 우리가 세계의 한 조각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그림에 대한 저작권료를 아예 받지 않고 그림을 실을 수 있게 해준 데 대한 감사 편지였다. 미국 산타페에서 활동하는 중년의 지지 밀스, 대학을 갓 졸업한 엘리너 레이, 캐나다 화가 카렌 달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니콜 플레츠. 나씨가 편지를 보낸 네 명은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하지만 구글 이미지 검색, 소속 화랑의 홈페이지, 그림을 올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얼마든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작가들이다.

 시선집에 실린 그림은 모두 64점. 오래전에 작고해 저작권료를 낼 필요가 없는 작가들의 그림이 15점이다. 한 장당 저작권료가 50만∼70만원 정도인 그림 49점에 대한 저작권료를 모두 지불한다면 도저히 그림을 곁들인 시선집을 출간할 수 없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씨는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 김희선(34)씨와 함께 시선집에 싣고 싶은 그림을 그린 작가들에게 대한 직접 접촉에 나섰다. 여성을 화자로 내세워 여성 문제를 다룬 시만 모은다는 시선집 취지에 맞춰 그림을 고르다 보니 대부분 여성 작가를 선정하게 됐다.

 네 명 중 일부는 나씨가 ‘염가 사용’을 요청한 그림들 외에 추가로 자신들의 다른 작품까지 사용할 것을 권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나씨가 참고하라고 보낸 영어 번역 시 작품들에 감동했다는 거다.

 특히 카렌 달링은 편집자 김씨에게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다.

 ‘Hello, I received the documents just fine thank you. I really enjoy Ra’s poetry, its wonderfully moving and thought provoking. Which images of mine was she interested in including in the book?’

 급하게 메일을 작성한 듯 구두점 사용에 일부 오류가 있지만 내용은 분명하다.

 ‘반가워요. 서류 잘 받았어요. 고마워요. 나희덕씨의 시는 정말 좋았어요. 놀라울 정도로 감동적이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요. 내 그림 이미지 중 어떤 걸 나희덕씨가 책에 포함시키고 싶어하나요?’

 나씨는 “페미니즘에는 꼭 남성의 기득권에 적대적으로 맞서는 전투적 페미니즘만 있는 게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부드러운 성향도 있다”고 말했다. 장르와 국경을 초월한 교감 끝에 탄생한 시선집이 그런 ‘부드러운 페미니즘’이 발휘된 사례 아니겠느냐는 거였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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