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대중의 공포는 존중받아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대중의 메르스에 대한 공포가 비과학적 호들갑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견해를 접할 때가 있다. 광우병, 신종 플루 때와 마찬가지로 실질적 위험성은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높지는 않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맞는 판단일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심리학은 다른 측면에도 주목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심리학자 폴 슬로빅에 따르면 다양한 위험 요소에 대해 순위를 매기도록 한 결과, 일반인들이 1위로 꼽은 원자력 발전을 전문가들은 최하위로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자동차 사고, 흡연이 압도적으로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위험을 인식하는 기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사망률 통계 등의 양적 지표에 따라 판단한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 거주하는 것이 평소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통계적으로 훨씬 안전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대중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슬로빅에 따르면 일반인이 체감하는 위험도는 양적 지표보다는 결과의 끔찍함 정도, 자신의 지식범위 밖에 있는 미지의 정도, 위험에 노출되는 사람 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고 한다. 치사율이 높다고 알려진 신종 전염병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한다. 한국인들이 미개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구조에 기인한 공포인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직관들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로 해석한다. 맹수·독초 등 미지의 위험이 가득한 원시 수렵생활에서 확률 계산을 하기보다는 과민할 정도로 일단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생존 확률이 높았을 테니까. 노벨상 수상자인 석학 대니얼 카너먼은 비록 비합리적일지라도 대중의 공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공포 자체가 고통스럽고 심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또 다른 위험 요소이므로 정책 결정자들은 대중을 실질적 위험뿐 아니라 공포로부터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환경청은 화학물질로 인한 위험 정도에 관해 지역주민과 대화할 때 대중을 정당한 파트너로 받아들일 것, 대중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일 것, 정직하고 솔직하게 공개할 것 등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의 7가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위험에 대응하는 전문가 집단은 냉철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하되, 대중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두려움을 존중하고 솔직하게 대화하며 안심시킬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라는 직업군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