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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법이 진 닥터” 서울 경찰서 31곳 중 29곳서 쫓기다 결국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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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태 전 봄은 유난히 추웠다. 겨울이 떠나지 않은 자리에 서둘러 봄이 당도한 듯했다. 2013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불 꺼진 서울 광진경찰서 당직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타닥타닥타닥-. 굵은 빗소리 같은 자판 소리가 텅 빈 당직실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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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일 관내에서 사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의사를 사칭해 음식점에서 신용카드를 편취해 달아났는데요. 혹시 비슷한 사건을 다뤘던 분 계신가요?’

 나는 경찰 내부망에 이런 글과 흐릿한 폐쇄회로TV(CCTV) 사진 한 장을 올렸다. 곧이어 댓글이 줄줄 달리기 시작했다.

 “수법 여전하네요. 하는 짓이 딱 ‘진 닥터’ 같은데요.”

 “진 닥터한테 사기당하는 사람들이 또 있네요. 2009년에 저한테 잡혔을 때도 수배가 40건이 넘었는데….”

 여러 경찰서 수사관들이 ‘진 닥터’를 지목했다. 진 닥터라면 나도 익숙히 들어봤던 이름이다. 사기 등 전과 46범 진모(45)씨. 사기로 세 번이나 복역했던 그가 또다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단 말인가. 고작 다섯 달 전(2012년 10월)에 만기 출소했다던데…. 나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광진서 관내에서 잇따라 발생한 사기 사건 9건이 모두 진 닥터의 과거 행적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확신은 굳어졌다.

 진 닥터는 과거 주로 손님이 별로 없는 영세 식당이나 유흥업소를 찾아 의사를 사칭했다. 의학서적이나 의사 가운을 보여주고 대역까지 고용해 상대를 속였다.

“제가 사실 의사인데 얼마 전 의료사고를 내서 자격이 정지됐거든요. 몇 백만원만 융통해주실 수 없을까요?”

 이번에 검거되기 전까지는 정장 차림에 변호사나 은행 배지를 달고 음식점 주인을 속였다.

“제가 일하는 은행에서 단체회식을 예약하려고 하는데요. 가장 비싼 메뉴를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와인이나 양주를 준비해주면 좋겠는데….”

주인이 식당에 와인이 없다고 난감해하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현금이나 카드를 주면 제가 종업원과 함께 가서 와인을 사올게요. 계산은 회식이 끝나고 같이 해주시고요.”

 주인이 종업원에게 카드나 현금을 주면 진 닥터는 다시 함께 나간 종업원을 속였다.

 “저기 빵집에 케이크를 주문해 놨는데, 시간이 없으니 찾아와 주세요. 저는 와인을 사놓을게요.”

 종업원이 빵집으로 가면 진 닥터는 카드나 현금을 들고 달아났다. 나는 처음엔 이렇게 단순한 수법에 누가 속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말쑥한 정장차림에 천역덕스럽게 연기하는 그에게 속수무책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기술자’였다. 교도소 복역 중에 조직폭력배에게 사기를 쳐 돈을 뜯어냈을 정도였으니까. 지난해 말 모델 이현이씨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단체회식을 한다는 중년신사에게 사기를 당해 600만을 잃은 적이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씨를 속인 것도 진 닥터였다. 이렇게 2년 반 동안 130회에 걸쳐 3억여원을 등친 진 닥터의 사기 행각은 서울 전역에서 벌어졌다. 서울 시내 31개 경찰서 중 29곳에서 그를 수배했다. 총 59건이었다. 서울 영등포·서대문·수서경찰서, 경기도 일산경찰서, 세종경찰서에선 진 닥터 검거 전담반까지 편성했다. 그러나 진 닥터는 ‘신출귀몰’ 그 자체였다. 짧은 거리도 3~4번씩 택시를 갈아타고 다니며 추적을 따돌렸다. 최종 목적지를 알기 어려웠다.

 “진 닥터가 중랑구에 떴다.”

 지난달 19일 서울 중랑구 망우사거리에 있는 족발집에서 사기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 진술을 들어보니 이번에도 진 닥터였다. 밤을 새워 망우사거리의 CCTV 영상을 다 뒤졌다. 수백 장의 CCTV 사진에서 진 닥터가 타고온 택시를 발견했다. 그러나 화질이 나빠 번호판을 식별할 수 없었다.

 이대로 또 놓치는 건가. 그런데 진 닥터가 타고온 택시가 어딘가 특이해 보였다. 다른 택시에는 없는 길쭉한 모양의 ‘기사 모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다음 날부터 서울 시내 택시회사를 모두 뒤져 진 닥터가 탄 택시를 찾아냈다. 그리고 택시가 운행된 길(13㎞)을 역추적해 진닥터가 처음 택시를 탄 곳이 신당동이란 걸 알아냈다.

 나는 최종 은신처를 확인하기 위해 인근 상점들을 모두 탐문했다. 그리고 집을 찾은 뒤 다시 12시간의 잠복. 우리 팀은 추적 열흘 만인 지난달 30일 저녁 드디어 진 닥터를 검거했다.

 진 닥터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며 여러 번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3형제 중 장남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어요. 의대에 2번 낙방했고 집안이 기울어 사기에 손을 댔고….”

 진 닥터는 1990년대 중반부터 사기 범죄를 저질러온 베테랑 사기꾼이다. 그의 진술을 다 믿기 힘들었다. 지난해부터 동거 중인 내연녀를 조사해 보니 진 닥터를 진짜 의사인 줄 알고 있었다. 그의 후회와 눈물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진 닥터가 다시 소리를 쳤다.

 “형사님, 이번엔 진짜예요. 제가 내연녀를 정말 사랑해서 사기를 쳐서라도 생활비를 갖다 줄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사기 피의자 진씨 인터뷰와 경찰 조사 내용을 취재한 결과를 광진경찰서 강력1팀 경찰관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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