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일본의「천황제」강재언<일 경도화원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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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9월 초 전 대통령 일행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과거한국에 대한 식민지 통치에 대해 일본천황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에 일본에서나 한국서 떠들썩했던 것이 어제 일 같이 기억에 새롭다.
그 이야기 내용에 대해서는 한국 매스컴에서도 자세히 보도되고 논평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되풀이하지 않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문화 가운데는 신도를 비롯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은데 특히 「천황제」 야 말로 한국적인 사고방식으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제2차 대전 후 일본 정부는 미 점령군당국과 끈질기게 교섭하여 일본의 「국체」를 보존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일본의 「국체」 란 무엇인가. 1937년에 일본문부성이 간행한 『국체의 본의』 란 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대일본 제국은 만세 일계의 천황이 황조의 신칙을 받들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만고부역의 국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황조」 란 일본역사의 신화시대에 등장하는 천조 대신, 혹은 신무 천황이다.
대전후의 신 헌법에서는 만세 일계의 천황이 일본을 영원히 통치한다는 것은 부정되었으나 그들은 끝끝내 신 헌법 「제1장 천황」 에서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국민통합의 상징」 이라고 규정하여 천황제의 명맥을 남기는데 성공하였다. 소위 「상징천황」 이란 것이다.
나는 법률에 대하여 자세히 모르겠으나 「상징」 이란 표현자체가 법제도상 어떤 내용의 것인지 참으로 애매하고 불가사의한 규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집권당인 자민당과 그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개헌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 논거는 신 헌법은 점령군 당국에 의하여「강요된 헌법」 이니 자주헌법으로 고치자는 것이다. 개헌안의 가장 촛점적인 문제는 전쟁포기를 규정한 제9조인데 동시에 천황을 「상징」으로부터 「원수」로 승격시키자는 것도 중요한 안건의 하나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천황제를 강화하여 군국주의를 부활하자는 것이라고 반대의견도 많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지금 일본정치에서 천황제가 왜 필요한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통합의 상징」 이 되고 있는데서 일본국민의 의식 속에는 제도로서의 천황이라기 보다는 신앙으로서의 천황관이 깊이 뿌리박고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천황을 중심으로 한 법률제도가 허물어지고 1192년에 정이대장군 원뢰조가 겸창 막부를 개설한 이후 1868년의 「왕정복고」 에 의하여 명치유신이 시작될 때까지의 소위 「무가정치」 하에서도 유명무실하게된 천황제가 그대로 보존되고 계승됐다. 이것은, 참으로 일본역사의 하나의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령 우리 나라 역사를 보자. 김춘추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통일 신라를 창건하였고 왕건은 통일신라를 멸망시켜서 고려조를 창건하였다. 또 이성계도 고려조를 멸망시켜서 조선조를 창건하였다. 즉 왕조가 바뀔 때마다「단절」 이 있었던 우리 나라 역사와 대비해 볼 때 유명무실한 천황제를 본존하고 계승해온 일본 역사와는 판이하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 고대사서인 『고사기』(712년) 나 『일본서기』 (720년)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만약 왕조교체에 의한 「단절」 이 있었다면 도저히 오늘까지 전승될 수 없는 것이다.
천황제가 좋고 궂은 것을 여기서 거론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 모순되는 것은 너무나 논리적으로, 혹은 명분론적으로 흑백을 따져서 이자택일 하는 우리들의 사고방식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천황제 하나를 두고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흑도 백도 너무 원리적으로 따질 것 없이 흐리멍덩하게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이 일본 사람들의 기질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 나라를 중심으로 한 근기지방의 고대유적들을 견학하고 나서 본국에서는 오래 전에 없어지고 만 소위 「일본 속의 한국 문화」 가 놀라울이 만큼 소중히 보존되고 있는 것을 보고. 경탄했다는 말을 빈번히 듣는다.
일본의 전통문화에는 창조적인 것이 별로 없고 외래문화의 모방이 많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오늘 일본이 융성한 원인을 생각할 때 「창조」보다도 「보존」 과 「계승」을 소중히 하는 그들의 기질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알기 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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