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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축제가 된 27년 강릉 맞수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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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 안에서

신라시대부터 내려왔다는 강릉 단오제의 개막을 하루 앞둔 6월 1일. 강릉농공고와 강릉제일고(전 강릉상고)의 축구 정기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강릉터미널에서 강릉종합운동장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농.상전'(올해부터 농.일전 또는 일.농전으로 이름이 바뀜) 얘기를 꺼냈다. 택시기사가 신이 나 말을 받았다.

"예전부터 농.상전 있는 날은 대단했지요. 시내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았어요. 경기가 끝나면 으레 싸움이 벌어졌지요. 여학생은 치마폭에, 남학생은 가방에 돌멩이를 가득 담고 시내 여기저기에서 투석전을 했어요. 그래도 누구 다쳤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지요. 요즘은 싸움은 안한다고 합디다. 강릉 시민들한테는 농.상전이 1년 중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지요."

"그래서 취재를 왔죠"라고 하자 그는 "우리 강릉 홍보 좀 잘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 강릉종합운동장

오전부터 본부석 왼쪽 스탠드에서 강릉제일고 학생 8백여명이 질서정연하게 응원 연습을 하고 있었다.

브라스밴드와 농악 장단에 맞춰 단순하지만 힘있는 율동을 펼쳤고, 재킷 앞섶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글자를 만들기도 했다.

응원단장인 학생회장 최건희(3년)군은 "지난해에는 우리 학교가 상고에서 인문고로 바뀌는 바람에 '응원 연습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는 이유로 정기전을 안했어요. 올해는 3학년이 '한번 해보자'고 앞장섰어요. 대신 비용과 시간을 크게 줄이고, 모든 준비와 연습을 학생들이 주관했죠. 응원 연습은 딱 두 번 했어요"라고 말했다.

정오 무렵. 마칭 밴드를 앞세우고 강릉농공고생 1천여명이 운동장으로 행진해 왔다.

선생님들을 사이에 두고 두 학교가 나란히 스탠드에 자리를 잡았다. 양 골대 쪽에는 동문 응원단인 강릉제일고 '블루 드래곤'과 강릉농공고 '으랏차차 Key K'가 마주보고 기세싸움을 벌였다.

아빠 손을 잡고 따라온 아이들은 응원보다 점심 도시락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 맞수의 손을 잡고

선수 입장. 양교 기수단이 도열한 사이를 두 팀 선수들이 손을 잡고 뛰어나왔다. 경기 직전에는 상대 응원단에 가서 인사를 했고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며칠 전 양교는 1,2학년생으로만 경기를 하기로 합의했다. 지난해 전임 감독이 선수들을 데리고 팀을 떠나는 바람에 제일고의 3학년생 선수가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동철 농공고 감독은 "3학년은 빼냈고, 연습은 이틀밖에 못했으니 이길 수가 없죠"라며 엄살을 부렸다. 박윤기 제일고 감독도 "저쪽은 워낙 멤버가 좋아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드디어 킥오프. 경기보다 농공고의 화려한 응원이 더 눈길을 끌었다. 오색 조끼를 이용한 보디섹션이 환상적이었다. 순식간에 '강릉시민''안녕하슈''young''power' 등의 글자를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탄성과 박수가 터졌다.

제일고는 동문석의 '색깔 공세'로 맞섰다. 2천여명이 파란색 티셔츠로 통일했고, 노랑.빨강 종이로 카드섹션도 펼쳤다. 경기 내내 수십 차례 파도타기 응원이 양쪽 스탠드를 들썩이게 했다.

6대4 정도로 주도권을 잡았던 농공고가 두 차례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면서 경기는 끝났다. 맞수의 대결답게 벌써 여섯 번째 연속 무승부였다.

# 강원도 축구협회장실

"경기가 탈없이 끝나 다행입니다."

최돈포 강원도 축구협회장이 말했다. 협회 직원이 말을 받았다. "전에는 승패에 집착했는데 요즘은 축제로 바뀌었어요. 시민들도 기대감이 대단하죠. 정기전 하는 날엔 영동 각지는 물론 서울에 가있는 강릉 사람들도 내려옵니다." 강릉이 축구 도시가 된 것도 두 학교의 라이벌 의식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제 축구 한.일전 봤어? 골 넣은 건 안정환이지만 이을용이 패스했고, 설기현이 흘려줬으니까 골이 된 거야. 강릉 사람 아니었으면 일본한테 못 이겼어."(이을용.설기현은 강릉상고 출신이다)

웃음이 터졌다. 2003년 '강릉 더비'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강릉=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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