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연예] 미니시리즈 '부활' 1인2역 주인공 엄태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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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돼 있더라'는 시인 바이런의 고백은 배우 엄태웅(31)에게도 꼭 들어맞는 말이다. 올해 초 방송된 KBS-2TV 미니시리즈 '쾌걸 춘향'의 변학도 역을 맡으면서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사랑을 뺏기 위해 교활한 술수를 부리는 악역인데도 시청자들은 그의 편을 들었다. 긴 무명시절을 거치며 무르익은 그의 연기력이 보는 사람의 공감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10여 년을 따라다니던 '엄정화의 동생'이란 꼬리표도 떨어졌다.

이제 그는 다음달 25일 첫 방송될 KBS-2TV 수목드라마 '부활'에서 주인공으로 안방극장을 찾는다. 그것도 1인 2역. 혼자서 일란성 쌍둥이 형제의 상반된 캐릭터를 보여 줄 계획이다. 데뷔 8년 만에 처음으로 미니시리즈 주인공을 맡게 된 그는 "극 전체를 끌고 갈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면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더욱 인정받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며 각오도 대단하다.

그가 연기자의 꿈을 갖게 된 것은 고3이던 1992년. 무려 13년 전 일이다. 친구들이 만든 그룹사운드의 싱어가 공연을 1주일 앞두고 펑크를 냈다. 노래를 곧잘 했던 그에게 친구들은 "대타가 돼 달라"고 부탁했고, 스스로 내성적이고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마지못해 서울 종로 탑골공원 뒤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조명이 그를 향해 비치고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볼 때의 기분. 그 자리에서 그는 쾌감을 느꼈다. '이런 게 직업이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해 가수로 데뷔한 누나 엄정화도 그의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뜻은 있었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다. 연극영화과를 지원한 대학입시에서 실패한 뒤 '밤에는 비디오 보고, 낮에는 밖에 돌아다닐 뿐,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시기'를 보냈다. 1997년 형같이 지내던 장진 감독이 영화 '기막힌 사내들'을 만들면서 그를 불렀다. 그가 맡은 역은 국밥집 종업원. 대사는 딱 두 마디였다. 그나마 그 뒤에도 일은 없었다. 99년 대학(경민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대학에 간 뒤 그는 연극으로 연기의 맛을 알았다. 극단 '우인'에 들어가 '꽃을 든 남자''인생은 즐거워' 등에 출연했다. 영화나 드라마나 오디션을 하는 데는 무조건 프로필을 집어넣었다. "거의 다 떨어졌으니까 100번도 넘게 퇴짜를 맞았을 것"이라니, 이미 톱스타가 된 누나를 생각하면 다소 의외의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누나가 인맥을 동원했으면 단역은 몇 개 더 했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큰 역은 못 맡고 신선함만 떨어뜨렸을 거예요."

홀어머니에 외아들인 그가 나이 서른이 가깝도록 꿈을 지킬 수 있었던 데는 누나의 힘이 컸다. 그는 "누나 덕분에 집안 경제에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었다"며 고마워한다. 하지만 그런 누나도 마냥 기다리지는 못했다. 그는 스물아홉 되던 해 누나에게서 "서른까지만 기다려 줄 테니 그래도 안 되면 딴 길을 찾아 보라"는 최후통첩을 들었다.

그의 길은 누나가 정해 준 시한을 꽉 채우고서야 뚫렸다. 영화 '실미도'가 실마리였다. 그는 훈련병 원상역을 공개 오디션을 통해 따냈다. 서류 전형과 연기.체력 테스트를 거쳐 캐스팅이 확정된 뒤 만난 강우석 감독이 "눈이 좋다"고 첫인사를 건넸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그의 대사가 많아졌다. '실미도' 촬영이 끝날 무렵 영화 '가족'에 캐스팅됐다. 그 뒤 SG 워너비 뮤직비디오와 드라마 '구미호외전''제주도 푸른 밤', 영화 '공공의 적2' 등에 잇따라 출연했고, '쾌걸 춘향'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갑자기 주목을 받으니까 처음엔 무섭기도 했어요. 다들 장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그냥 내 운이라고 생각하고 즐기기로 했어요. 인기란 게 언제 가버릴지 모르는 거잖아요."

'쾌걸 춘향'이 끝나자 그를 캐스팅하려는 영화.드라마 제작사가 줄을 섰다. "그동안 나를 써준 KBS가 너무 고마워 KBS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기준에 따라 KBS 미니시리즈가 차기작이 됐다. 이렇게 인간미 넘치는 그는 "최민식 선배처럼 사람 냄새나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그동안 대부분 악역만 했는데 이제는 따뜻한 멜로 연기도 하고 싶다는 꿈도 수줍게 내비쳤다.

글=이지영<jylee@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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