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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투수의 용기가 없다면 … 이승엽 400홈런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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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삼성 이승엽이 2003년 10월 2일 시즌 최종전에서 아시아 신기록인 56홈런을 치고 기뻐하고 있다. 마운드 위에 홈런을 맞은 롯데 이정민이 서 있다. [중앙포토]

프로야구 롯데 이정민(36)에겐 한동안 ‘허용 투수’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정민이 2003년 10월 2일 이승엽(39·삼성)에게 56호 홈런을 맞고 나서 생긴 별명이다. 아시아 최다 홈런 기록을 ‘허용’했다고 해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TV 뉴스엔 이정민 얼굴 아래 ‘56호 허용 롯데 투수’라는 자막이 달렸다. 프로야구 선수가 이름이 아니라 ‘홈런을 허용한 투수’로 불리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최근 이정민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통산 400홈런에 한 개만을 남겨둔 이승엽이 롯데와 포항 3연전을 치르기 때문이다. 불펜투수인 이정민이 이승엽과 맞붙을 가능성도 있다. 이종운 롯데 감독은 “이정민이 나가야 할 상황이 온다면 (홈런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투입하겠다”고 말했다.

 이정민은 12년 전 그 경기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프로 2년차였던 그는 마운드에 오르기 전 기자들로부터 “이승엽과 승부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모두가 이승엽이 홈런을 때리기를(즉 이정민이 홈런을 맞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이정민은 2회 이승엽과의 첫 대결에서 홈런을 맞았다.

 ‘허용 투수’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었지만 그는 이날 데뷔 첫 선발승을 거뒀다. 이정민은 경기 후 “처음부터 정면 승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원하는 (낮은 코스) 공을 던졌으니 미련은 없다. 이승엽 선배는 정말 배울 게 많은 타자다. 다음에는 삼진을 잡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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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런을 맞은 이정민보다 더 심한 마음고생을 한 투수도 있다. 롯데 가득염(46·현 두산 코치)은 그해 9월 27일 부산에서 이승엽을 상대했다. 2-4로 뒤진 8회 초 1사·1루에서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서자 포수 최기문은 일어서서 공을 받았다. 고의볼넷. 사직구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관중은 “누가 롯데 이기는 거 보러 왔나. 이승엽 홈런 보러 왔데이”라며 쓰레기를 경기장 안으로 내던졌다. 소요 사태가 진정되고 경기가 속개되기까지 1시간34분이나 걸렸다. 훗날 가득염은 “벤치 지시에 따라 고의볼넷을 내줬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마침 그날 두 딸이 사직구장에 있었다. 승부를 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줘 마음이 아팠다”고 회상했다.

 기록을 내준 선수는 흔히 ‘대기록의 희생양’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김원형(43) SK 코치는 2003년 6월 20일 이승엽에게 솔로포를 내줬다. 이 홈런으로 이승엽은 일본의 오 사다하루(왕정치·27세3개월11일)보다 빠른 26세10개월4일 만에 세계 최연소 300홈런 기록을 세웠다. 김원형은 “이승엽은 최고의 타자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어 정면 승부를 했다”고 말했다. 김원형은 3년 뒤 양준혁에게도 통산 300호 홈런을 허용했다.

 지난해에는 SK 채병용(33)이 정정당당한 승부를 벌여 박수를 받았다. 10월 17일 열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1회 넥센 서건창에게 2루타를 맞았다. 프로야구 최초의 시즌 200호 안타를 친 서건창은 채병용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박찬호(42) 역시 대기록 앞에 의연한 투수였다. LA 다저스 시절인 2001년 10월 5일 샌프란시스코전 선발로 나선 그는 팬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배리 본즈가 앞선 경기에서 홈런을 쳐 마크 맥과이어가 세운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70개)과 타이를 이룬 상황이었다. 본즈가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기는 쉽지 않았다. 69호 홈런을 친 뒤 상대 투수들이 승부를 피한 탓에 19타석에서 12번이나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박찬호는 거침없이 스트라이크를 던졌고, 결국 본즈에게 연타석 홈런(71, 72호)을 맞았다. 더스티 베이커 당시 샌프란시스코 감독은 “그들은 그에게 던졌다(They pitched to him)”며 짐 트레이시 다저스 감독과 박찬호에게 경의를 표했다.

 맞으면 아프지만 모두가 안 맞으려고 도망가면 기록은 세워질 수 없다.

◆롯데전서 홈런 없이 3안타= 이승엽은 2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홈런 없이 5타수 3안타·3타점·3득점을 기록했다. 8회 1사 만루에서 때린 타구가 우중간 펜스를 맞고(2루타) 떨어진 게 아쉬웠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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