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2)|<제81화>30년대의 문화계(85)-하몽의 「중외일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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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런 궁상에 빠졌을 때 출자하겠다고 나선 것이 보천교였다. 보천교주 차경석은 대시국을 세운다고 말한 사람으로 신문경영에 착안해 시대일보에 손을 뻗쳤다. 한편 최남선은 자본금 20만원의 주식회사를 만들려고 분주하던 때라 서로 연때가 맞아 보천교는 우선 전도금으로 3만원을 시대일보에 출자하였다. 이 3만원이 시대일보 발행권을 에워싸고 보천교와의 사이에 말썽을 일으키게 된 화근이 되었다. 이 투자를 핑계삼아 보천교에서는 부사장 자리를 달라고 요구해왔고 야금야금 경영권과 인사권을 달라고 덤벼들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신문발행인의 명의가 보천교의 이성영이란 사람 이름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사원들이 궐기해 사우회측과 보천교측이 분쟁을 계속했다. 이렇게되자 보천교측에서는 분쟁수습을 이유로 7월10일부터 10일간의 휴간원을 경무국에 제출하였다.
이것을 본 사회 유지들이 토의회를 열고 『우리는 사회의 공기인 신문이 종문이나 개인의 전유기관이 되는 것이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것이 큰 것을 인정하고, 금번 시대일보가 보천교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절대로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발행권만은 이성영이 가지고 있고, 사우회가 일체의 경영을 맡기로 되어 휴간중이던 시대일보가 9월1일부터 속간되었다.
이 사건에서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신문이 여느 종문일파의 기관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회여론이 맹렬했다는 것과 이 여론이 마침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보천교는 물러나고 시대일보는 1925년 4월 이범세를 비롯한 홍희·윤희중·조준호·한기악등이 재단을 만들어 편집국장에 한기악, 영업국장에 김익동이 취임하여 다시 민간 3대신문의 하나로 소생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재정난에 못견뎌 1926년 여름부터 휴간을 계속하다가 필경 폐간당하고 말았다.
이상협은 시대일보의 발행권이 취소된 것을 보고 새로이 서울의 부호 백연기와 영남의 지사 안희제의 출자를 얻어 중외일보의 발간허가를 얻어 냈다. 사옥은 화동에 있는 그전 동아일보 자리를 얻어 1926년 11월 창간호를 내놓았다. 편집국장에는 역시 우보 민태원을 앉히고 김형원·유광렬·정인익·김기진등 기라성같은 기자들을 각 부서에 배치하여 조선일보에서 실현될 뻔하다가 못 이룬 조선에서 제일가는 신문을 만든다는 꿈을 기어이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조·석간 8면을 발행하면서도 월정 신문대금이 1원인 것을 40전내려서 60전으로 하고 최량·최렴의 신문임을 표어로 하여 동아·조선에 도전해 갔다. 연재만화로 『멍텅구리』대신 천하의 기인 정수동을 모델로 하는 『정수동』을 이상협이 아이디어를 내고 노수현이 그려 독자의 인기를 끌어갔다.
그러나 약속한 자금조달이 뜻대로 안되고 신문은 압수가 잦아 경영이 점차로 곤란해 가던중 1928년 3월 이정섭의 집필로 연재중이던 『세계일주기행』이 독립사상을 취하였다고 하여 문제가 되어 발행인 이상협과 필자 이정섭이 종로서에 검거되었다. 재판이 3번까지 가서 이상협은 벌금 2백원, 이정섭은 집행유예 2년으로 끝났다. 이 때문에 경영난에 빠져 휴간중이던 중외일보는 다시 안희제·이우직에게 넘어가 15만원 전액불입의 주식회사로 성립되어 1929년9월 속간되었다.
그러나 인건비가 수입보다 많은 기현상을 보여 또다시 경영난에 빠졌고, l931년 2월부터는 석간 4면으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9월에 이르러 해산하고 말았다.
3·l운동 당시 큰 뜻을 품고 매일신보를 뛰쳐나와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다시 조선일보를 혁신, 중홍시키고 중외일보를 경영하던 이상협은 기진맥진하여 민간신문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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