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독서감상문」최우수작 |"기독교이론 일부는 잘못서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다음 글은 중앙일보가주최한 제11회「중앙독서감상문모집」의 대학일반부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힌 이두백씨의 글이다. 2백자 원고지12장 분량을 지면사정상 7장으로 요약했다.
해석학적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이론이 처해진 배경에 어느 정도 지배를 받고 있다면, 미국이라는, 그것도 백인사회라는 상황속에서 내린「니버」의 판단이 냉철한 지성적 판단일진 모르지만 제3세계의 고난을 포용하지 못하기에 그는 한면에선 거것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느낌을 보편적으로 확대해석하여 고집부린다면, 그는 모든 면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기독교는,「니버」의 말처럼 비극을 초월함으로써 비극을 해결하려는 종교가 아니라, 비극을 껴안음으로써 비극을해결하려는 종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 모순의 해결은 인간적인 가능성이 아닌, 신적인 가능성이라는「니버」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 책 맨끝말『사도신경의 희망을 거부한 실질적인 원인은 현대인이 인간 실존의 문제를 그 모든 복잡성에서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는 말은 틀린다. 만일 내가「니버」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을 옳게 파악했다면, 나는 그것을 한 명제적 표현으로 이렇게 그리고 싶다.
『인간이 아닌 신이 존재하며, 그 신이 역사 성취의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역사는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을 넘어서 있다』그에게 있어서의 인간과 신의 차이를 무자비하게 까뒤집어 본다면, 무한성과 유한성의 차이, 전능과 무능의 차이, 주는이와 받는이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 뿐이다.「니버」의 말에서 신이 죽어가고 있다는말을 들을수 없다. 신이 강도맞아 죽어가는 사마리아사람이라는 말을 들을수 없다. 신이 구원을 받아야된다는 말을 들을수 없다.
그는 『…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비극을 넘어서 있다』고 말함으로써 역사 모순의 해결을푸른 하늘 위에 던져 놓는다.
좀더 나은 역사를 위한 투쟁적 몸짓의 끓는 비명소리를 구원의 동기로 보지 않는 그 앞에서, 전봉준의 피는,「스파르타쿠스」의 피는, 역사의 제단앞에 바쳐진 그 모든 회생의 피는 한갓된 허무의 행위로 떨어지고 만다. 의미가 있다면 인간의 어쩔수 없음을, 그 무기력을,그 교만을 한껏 더 드러내준 의미만 있을뿐, 그 이상의 다른 의미가 없는 맹목적 행위일뿐이다.
주관이 객관을 꿰뚫고 주관으로 와야하듯이, 하늘이 땀을 꿰뚫고 다시금 하늘이 돼야 하듯이, 예수는 프로메테우스를 꿰뚫고 지나가지 못하면 예수가 될 수 없다.
「왜 인간은 원죄를 껴안고 살수밖에 없는가.」나는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철저히 원죄를 껴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역사를 껴안고사는 것이며, 비극을 넘어서려는 끊임없는 싸움의 선위에 인간을 서게 하는 것이다. 「니버」의 기독교 역사관의 판단은 인간실존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룻되었다. 피에 대한 신학적 아폴리지가 없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