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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출산 기피 세대의 이유 있는 항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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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박현영
사회부문 기자

취업준비생 장모(28)씨는 평일엔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닌다. 주말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고시원에서 생활한다. 3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데 결혼은 꿈도 못 꾼다. 남자친구는 대학 졸업을 유예하고 구직 중이다. 장씨는 “요즘 젊은 층 사이에서 우리나라를 ‘헬(hell) 조선’이라고 부르는 게 유행이다. 불행한 나라에서 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헬 조선’은 조선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후진적 정치, 국가 운영을 조롱하고 삶이 지옥 같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9일 보건복지부는 ‘저출산 추세 반전을 위한 근본적 해법 모색 토론회’를 열어 장씨를 비롯한 대학생·직장인·주부 등을 초대했다. 지난 십 수년간 한국이 초저출산 국가가 된 요인, 결혼과 출산을 가로막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책 수요자들로부터 직접 들어보기 위한 자리였다.

 청년들의 일자리가 없다는 점이 우선 지적됐다. 주거 문제도 거론됐다. 4년 전 결혼한 오모(33)씨는 부부가 월급을 모아 전세금 1억원을 마련해 연립주택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주차장이 없고 치안도 불안했다. 설상가상으로 2년 후 재계약 시점엔 전셋값이 2억원으로 올랐다. 오씨는 “수입의 90%를 집값 마련에 쓰고 있는데도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남자 동창생들은 대부분 집을 마련할 자신이 없어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교육비 부담도 도마에 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딸에게 영어·수학·논술 등 한 달에 100만원을 사교육비로 쓰는 김모(38)씨는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가 없고 사교육을 받은 과목은 성적이 잘 나오기 때문에 안 시킬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아이를 여럿 낳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구조라고 지적했다.

 김모(37)씨는 자녀 둘을 키우느라 직장을 그만둔 사연을 들려줬다. “아이가 입학하면서 녹색어머니회, 도서관 사서, 학교 청소, 참여 수업 등 학교가 엄마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많았다. 미혼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결혼한 선배 여자들의 ‘결혼 후기’가 너무 안 좋기 때문이다. 사소한 물건을 살 때도 사용 후기를 읽어보고 선택하는 젊은 세대를 설득하려면 결혼한 여성, 그 가족의 삶이 실제로 행복해져야 한다.”

 초저출산 사회에서 벗어나려면 청년 일자리, 안정된 주거 환경, 공교육 강화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양육비 보조나 세제 혜택 등의 ‘반창고’ 처방만으로는 ‘출산 파업’ 또는 ‘출산 태업’ 중인 2030 세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날 토론회는 암울한 이 땅의 현실과 앞으로 우리 사회가 풀어나가야 할 엄청난 숙제를 다시금 일깨워줬다.

박현영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