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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평등 꿈꾸는 네티즌 … 비밀 게시판 차별대우에 분노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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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델(DELL)은 ‘모니터 대란’을 발견한 뒤 접속을 막았다. 이후 오류라며 모든 주문을 취소했다.

root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에게는 ‘뿌리’로 이해되지만, 컴퓨터를 자주 접하는 시스템 엔지니어들에게는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최고 관리자’를 뜻한다. 해커들이 컴퓨터를 마음대로 하기 위해 가장 접근하고 싶어 하는 권한이 바로 이 root 권한이다. 컴퓨터 시스템은 하나의 자원을 여럿이 나눠 쓰는 구조적 특징 때문에 사용자의 권한이 이처럼 최고 권한부터 가장 낮은 등급의 권한까지 서열화돼 있다.

 컴퓨터에서 이 권력은 ‘누가 먼저인가’에 맞춰져 있다. 가장 우선 실행되는 프로그램이 운영체제이고, 가장 먼저 접속하는 인터넷 서비스가 검색포털이다. 그래서 그 처음을 장악한 마이크로소프트(운영체제)나 구글(검색포털) 같은 회사가 세계적인 기업이 된 것이다. 휴대전화에서는 첫 화면의 메뉴를 장악한 자가 지배자다. 한때는 통신회사와 휴대전화 제조회사가 그 첫 화면을 지배했다. 스마트폰이 들어온 이후에는 각종 앱이 그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인다. 마치 단축 전화번호 1번이 누구인가가 가장 큰 관심사인 것과 같다.

 우리가 흔히 ‘평등한 온라인 세상’이라고 알고 있는 인터넷도 사실은 이렇게 권한에 차별을 둔 시스템들이 서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인터넷은 그 기저부터 불평등하다. 동호회에 들어가도 등업(등급 업그레이드)을 묻는 질문이 흔하다. 온라인게임은 기본적으로 레벨 오르기 싸움이다. 인터넷 용어 중 하나인 ‘만렙’은 게임 캐릭터가 갖는 최고의 레벨을 말한다. 이른바 킹왕짱, 구루, 성주, 본좌, 느님, 갑 등 인터넷에는 최고 등급을 표현하는 수많은 용어가 있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인터넷 세상에서 평등한 공동체를 꿈꾼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나이와 학력, 성별과 외모, 지위와 빈부의 차이가 없이 누구나 공동의 원칙을 지키면서 공감하고 공유하며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님’으로 서로를 존대하는 인터넷의 오랜 전통은 디시인사이드(dcinside) 같은 사이트에서 ‘~흉아(형아를 비튼 말)’ 식의 애교 있는 반말로 바뀌기도 하지만, 여전히 네티즌들에게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려는 정신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이런 정신은 같은 취미, 같은 성향의 동호회에 속해 있을수록 평등 의식으로 나타난다.

 동호회 게시판에 들어가 글을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회원들은 마치 중세시대 성안에 사는 사람을 성 밖의 야만인과 비교해 스스로 문명인이라 부른 것처럼 자부심이 있다. 동호회의 문화, 게시판에 쌓인 우수한 정보들, 고급 콘텐트들은 회원들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시판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지배자라기보다는 ‘운영자’라는 이름의 서비스맨으로 이해된다. 즉 주인은 동호회 회원들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런데 이 회원들도 모르는 또 다른 게시판이 숨겨져 있었다면, 그리고 그 게시판에서는 더 많은 권한과 금기시돼 있는 성인 게시물까지 올릴 수 있는 비밀조직이 있었다면 회원들의 자부심은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이 바로 최근 유명 카메라 동호회인 slrclub에서 여성시대라는 특정 동호회 회원들만 사용 가능한 톱시크릿 게시판을 몰래 운영하다가 회원들에게 발각되어 난리가 난 ‘slr 여시’ 사건이다. slr 여시 사건은 많은 회원이 ‘디지털 난민’을 자처하며 동호회를 탈퇴하고 운영진이 사과문을 올리는 등 한바탕 큰 홍역을 겪었다.

 이 사건과 비교해볼 만한 사건이 유명 컴퓨터 제조사인 델(DELL)사의 모니터 가격 실수 사건이다. 델사의 정상가 55만원 수준의 24인치 LCD 모니터를 13만원 정도에 구입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진 지난 5월 8일 네티즌들은 앞다투어 이 모니터를 구매했고 이것이 ‘모니터 대란’이 되었다. 그러나 델사는 시스템 오류라며 이를 모두 취소했다. 상당수 언론매체들은 주로 델사의 시스템 오류와 주문 취소 처리를 비난하며 네티즌들이 분노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네티즌들은 의외로 차분했다. “아쉽다”는 정도였다. 스스로 가격이 지나치게 싼 것에 대해 실수였을 것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특권이나 차별적인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 네티즌 스스로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서 찾지 못한 평등의 이상향을 네티즌들은 사이버공간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터넷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그리는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이런 의연한 네티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여전히 인터넷의 미래는 긍정적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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