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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염치를 잃은 한국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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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Is the American Century Over)』 지난주 번역 출간된 조셉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최신 저서 제목이다. 미국 당대의 최고 국제정치 전문가 중 한 명인 나이 교수는 미국의 세기를 종식시킬 수 있는 잠재적 도전 세력들의 실력을 하나하나 점검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일본·러시아·인도·브라질 모두 미국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하지만 중국 또한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 그리고 그 총합인 스마트파워에서 적어도 수십 년 내 미국을 능가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다. 고로 외부의 도전에 의해 미국의 세기가 끝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미국의 문제다. 로마제국이 내부의 분열과 부패 탓에 무너졌듯이 미국 자체의 문제 때문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교수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정치 시스템이다. 그는 미국 정치제도 곳곳에 자리 잡은 마비 현상들 때문에 국력의 구성요소들이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정파적 대립으로 인한 국정 마비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비록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중요한 질문은 지금의 이런 제도들로 미래에 당면하게 될 문제들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라고 그는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공통된 문제 중 하나는 ‘끝이 없는 선거운동(endless campaign)’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치참모였던 칼 로브가 즐겨 썼던 말이다. 대통령선거가 끝나면 총선이 있고, 총선이 끝나면 지방선거가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정치인들의 유일한 목적이 됐다. 상대를 꺾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준법과 탈법 사이에서 위험한 곡예를 하고 부정한 거래도 서슴지 않는다. 손가락질 받아도 이기기만 하면 그냥 넘어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지금 이기는 게 중요할 뿐 체면이고 뭐고 없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정치인들의 파렴치한 행태는 정도의 차이일 뿐, 민주주의를 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지난 주말 노무현 전 대통령 6주기 추도식장에서 노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향해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전직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며 내리는 빗속에서 정상회의록 일부를 피 토하듯 줄줄 읽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셨다”고 김 대표를 대놓고 조롱했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때와 장소는 가려야 한다. 조문 온 문상객을 상주가 면전에서 욕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다. 고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보인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염치를 모르는 한국 정치의 핵심을 찔렀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염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낯을 들고 그 자리에 나타날 수 있는 거냐고 건호씨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상대 진영 대선 후보에게 종북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죽은 전직 대통령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선거에서 이길 목적으로 국가 기밀까지 공개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화합과 통합에 앞장서는 ‘대인배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너무 몰염치한 처사 아니냐는 성토였을 것이다.

 멀쩡한 사람도 정치판에 가면 철면피가 된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고 정치인으로서 출세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권만 그런 게 아니다. 그 누구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할 고위 공직자와 군인들 중에도 염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맹자가 말했듯이 부끄러움을 아는 데서 의(義)는 시작된다.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부터 염치를 모르니 한국 사회 전체에 사람 사는 도리가 제대로 설 리가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남은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되면 그만이고, 무슨 짓을 해도 나만 잘 살면 그만이란 식이다. 한번 잡은 권력은 최대한 오래 누려야 하고, 한번 오른 자리는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하고, 힘있는 자리에 있을 때 최대한 잇속을 챙겨야 한다는 식이다. 누구보다 체면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우리에게 염치는 사치가 됐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다”는 말을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노무현이야말로 염치를 아는 마지막 한국 정치인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무덤 앞에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염치 없는 짓이다. “창피한 줄 알라!(Shame on you)”는 말은 미국보다 한국 정치인들에게 더 필요한 말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