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7)-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70)|횡보의 고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오늘, 백화가 한잔 내는 날이라면서! 나 백화 술 좀 먹어야지!』
춘해는 자칭 미남자 방인근의 매력이라고 자랑하는 눈웃음을 치면서 백화를 바라보았다. 『조선문단』때 내 술을 많이 먹었으니 너 오늘 한잔쯤 내도 좋다는 뜻인듯 싶었다.
『춘해, 잘 왔어!』
백화는 춘해한테 이렇게 대꾸하였다.
『젊은 사람이 술 좀 작작먹어…』
춘해는 나한테 이렇게 수작을 붙이면서 내잔에 술을 따랐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다섯이고 백화는 40이 꽉 찼고 횡보와 춘해는 서른 대여섯이었다.
『흥! 일전에 집에 간 생각나요? 술 작작 먹으란 말은 내가 춘해한테 할 말이어요.』
『하하하…. 그날은 참 미안했어. 어떻게 그만 정신이 깜빡해서 그지경이 되었거든…』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나만 듣게, 『집 사람이 무어라구 하지 않았어?』하고 미안한 눈치로 슬쩍 이렇게 물었다.
춘해는 시골있는 논밭을 팔아 서울 올라와 잡지 『조선문단』을 시작하였다. 1923년10월이었다. 잡지는 잘 팔려 3천부가 다 나갔지만 춘해는 술을 좋아해 김억 현진건 염상섭등 술꾼들하고 매일 요릿집에 출입해 돈을 탕진하였다. 이것은 춘원의 증언이니까 틀림없을 것이다. 얼마 안가서 잡지도 집어치우고 집도 서대문성밑으로 옮겨 궁한 살림을 하고있었다.
부인 전춘강여사는 소설가 늘봄 전영택의 누님으로 여류문인이었다. 남편 춘해가 술이 억병이 되어서 친구를 끌고 집에 돌아와 술을 가져오라고 주정을 하는 일이 많았고 친구들도 덩달아 주정을 했다. 어느때 참다못해 춘강여사가 무어라고 대꾸를 했더니 이것이 어떻게 춘강여사가 술친구들한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했다고 잘못 소문이 났다.
일전에도 내가 취한 춘해를 부축해 가지고 그집에까지 갔었는데 부인은 나한테 고맙다고 깍듯이 인사하고 잘 부축해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춘해를 놀리느라고 일부러 『부인께서 나보구 남의 남편을 어떻게 술을 먹였길래 이지경을 만들었느냐고 호령호령 하십디다』하고 웃었다.
『그렇지, 호령 들어야 싸지. 대문호 방춘해선생을 그지경을 만든 놈들은 춘강여사의 호령을 받아야 싸단말야!』
횡보는 춘해를 흘끔거리면서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실상 춘강여사의 호령을 받은사람은 횡보였다고 한다.
춘해는 『조선문단』에 실리는 횡보의 소설에 대해서 원고료 대신 늘 술을 사주었고 사실 따지면 원고료 보다 술값이 더 들어갔다.
횡보의 주량은 굉장했고 춘해도 이에 못지 않아 두 사람이 붙으면 돈이 바닥나고 외상술 먹을 수있는 최후의 선까지 가고 그래도 부족해 춘해집에까지 가서 고래고래 술을 내오라고 야단법석을 하니 이런일이 있음직도 한 일이었다.
이렇게 한바탕 웃은 뒤 나는 우리들이 꾸미고있는 순수문학단체에 횡보를 리더로 추대하자는 일부의 의견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데 내가 리더는 무슨 리더야! 그 쓸데없는 소리말라고 그래요.』
횡보는 참가할 사람들의 이름을 묻고 나서 이렇게 잘라 말했다. 춘해와 백화는 좋다고 나서라고 했지만 횡보는 고집이 여간이 아니어서 한번 안한다면 안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횡보가 나서야지 프로문학패를 두들기지 다른 사람들은 힘이 약해. 전번에도 박영희가 횡보한테 두들겨 맞고 꼼작 못하지 않았어!』
조선일보에 10여회에 걸쳐 횡보 대 회월의 대논쟁이 있었던 것을 춘해는 이야기하면서 횡보더러 나서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