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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대한민국남편들아] 두 얼굴의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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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한자가 집 우(宇), 집 주(宙)다. '생명의 집'이라는 뜻이겠지만 거꾸로 '집이 곧 우주'라는 뜻으로 풀어본다. 우주에서 별 볼 일 없는 나는 앞으로 집안일에 대해 써볼 작정이다. 집안일이니 먼지처럼 사소한 내용이 많을 터다. 따지고 보면 우주도 사소한 먼지로 이뤄져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는 편이다. 출근 시간은 오전 9시지만 늦어도 7시30분까지는 출근하기 위해 6시쯤 집을 나선다. 아내가 아침잠의 달콤함에 푹 빠져 있을 시간이다. 최대한 소리 죽여 샤워하고 옷 입고 조심조심 뒤꿈치 들고 방문을 나선다. 잠꼬대처럼 아내가 한마디 한다.

"기다리는 여자라도 있어?"

여자의 육감은 정확하다. 정말 회사에는 내가 출근하기를 기다리는 여자가 두 사람이나 있다. 뭔가 로맨틱한 아침을 상상하는 분들이야 실망스럽겠지만 실은 지극히 사무적이다. 그들은 청소하는 분들이다. 회사가 개인정보를 다루는 곳이라 직원이 직접 사무실 문을 열어야 한다. 그래서 그분들은 매일 아침 복도에서 목이 빠지게 나를 기다린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텅 빈 사무실에서 크게 틀어놓은 음악을 듣는 사치는 그럴싸하다.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한 시간 반의 느긋함은 더욱 그럴싸하다. 그러나 그 모든 정황을 설명하기에 내 말주변은 얕고 아내의 아침잠은 깊다. 또 아내의 말이 정말 기다리는 여자가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다 그저 '한눈팔지 말고 잘 다녀오라'는 인사이므로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다녀올게."

나는 늦게 퇴근한다. 일찍 퇴근하는 경우도 있지만 늦은 귀가가 많다. 퇴근과 귀가 사이 나는 서점을 가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한다. 아내는 자신보다 늦게 귀가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 말에 따르면 일찍 들어오는 나와 늦게 들어오는 나는 아예 사람이 다르다. 아내보다 일찍 귀가한 나는 아이들과 함께 저녁 챙겨 먹고 설거지하고 집안 정돈하고 아내를 기다리는 '착한 남편'이다. 그러나 늦게 들어오는 나는 그 모든 일을 피곤한 아내에게 떠맡기고 밖에서 싸돌아 다니는 '나쁜 남자'라는 것이다. 아내가 불만이거나 말거나 나는 여전히 밤 늦게 집에 들어가서는 다음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오늘도 그렇게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한마디 한다.

"이불 개기 싫어서 일찍 나가는 거지?" 잘 다녀오라는 아침인사가 바뀌었다. '딴 데서 놀지 말고 곧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경고다. 이처럼 아내의 말은 겉말과 속말이 다른 경우가 많다. 아내에게는 여전히 '쇠귀'지만 그나마 말귀가 트이게 된 것은 아내의 포기할 줄 모르는 가르침과 꾸짖음 덕분이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 나오는 대사를 흉내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적은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는 게 아니다. 남자가 남편으로 변하는 일이다." '오늘은 정말 일찍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내 발걸음은 다시 술집을 향한다.

김상득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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