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실마리 놓칠 수 없다는 의지|「북적의 물가 제공」수락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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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가 수재를 당했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우리의 비해 무척 어려운 북한측으로부터 물자를 받는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국민들간의 성금과 정부예산 및 이재민 스스로의 노력으로 복구작업이 원활히 진행중이라 국제 적십자사연맹의 원조제의 마저 사양한 처지다.
이렇게 경제·사회적 필요란 차원에서는 우리가 수재복구를 위해 북한은 물론 외부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적십자사의 물자제공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그 물자가 필요하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를 계기로 남북한간의 상부상조 및 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어보려는 뜻에서다.
북한측이 수재민에 대한 물자제공제의를 한 것은 남북한동포와 제3세계 등 국제사회를 향한 선전목적에서임이 분명해 보인다. 아마 과거의 예처럼 십중팔구는 우리측이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가 북한의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북한측에 절호의 선전기회를 제공하게될 위험도 없지 않다.
한적의 각계 의견수렴 과정에서 대개는 전진적인 발상이란 찬성의 뜻을 밝혔으나 개중에는 북한의 선전효과를 노린 허세놀음에 말려들 위험에 대한 경계와 우려를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족애를 내세우고 있다지만 실제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있는 북한의 실정을 볼 때 북한의 저의는 뻔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북한측은 지난 8월20일 전두환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한 경제협력을 제의하면서 북한동포의 생활향상을 위한 기술·물자를 무상으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을 때 반공정책포기·주한미군 철수 등이 선행돼야 한다는 등 엉뚱한 주장을 들고나오며 전면 거부한 바도 있다.
이렇게 북한측의 저의가 거의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측이 북적의 물자제공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한데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다.
우선 이 물자를 받아들이면 단기적으로는 우리측이 선전효과나 심리전적인 측면에서 손해를 보는 것 같을 시 모르나 어차피 현재와 같은 경색을 풀자면 어느 한쪽이 유연성을 보여야하고 그것은 어느 면으로나 처지가 나은 우리가 약간 손해를 보는 것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북한에 대해 국력의 우위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설혹 북한측이 이를 선전자료로 이용하더라도 북한측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획기적인 선례를 만듦으로써 앞으로 북한에 재해가 발생해 우리가 원조를 제공할 경우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쐐기가 된다는 뜻이 있다.
평화통일을 위하여는 비정치적인 부문에서의 점진적인 교류가 필요하며 그를 위해서는 대화가 있어야 하고 대화의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는 여하한 접촉의 기회라도 버릴 수 없다는 확고하고도 결연한 의지가 깔려있다.
이러한 의지를 대가를 감수하면서도 현실화하기로 한데는 우리국력의 절대적·상대적 우세가 그 바탕이다.
폐쇄경제체제를 고집하면서 대남 적화통일을 위해 GNP의 24%나 되는 과도한 군사비를 투입해온 북한은 만성적인 식량난·에너지부족·수송낙후·외채상환능력상실·기술난 등 5인 경제난에 처해있다.
국력을 가늠하는 국민총생산(GNP)규모로는 5·2대1(한국7백65억 달러, 북한 1백45억 달러), 주민생활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1인당 GNP는 한국이 1천8백84달러, 북한이 7백65달러로, 2·5대1의 격차를 나타내고있다<별표참조>.
경제력에 있어서의 이러한 우리의 우세는 북한주민 외에는 국내외적으로 공지사실이기 때문에 있을지 모를 북한의 선전공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이 깔려있다. 더욱이 북적이 제공하겠다는 쌀·옷감·시멘트·의약품 등은 생산량이나 질·기술수준에 있어 우리와는 도저히 비길 수 없는 것으로 오히려 북한주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우리가 원조해 줘야할 품목들이다.
그러나 우리측이 또 이를 거절하면 우리측이 진지하게 희구하는 남북한간의 물자교류·경제협력의 길은 다시 멀어져 돌파구가 마련되기 어렵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인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경계해야 할 점은 북한이 우리의 아량을 역이용, 이를 선전거리로 이용하는 것이다.
북한주민의 궁핍 상이나 남한의 대북한경제력 우위는 우리국민과 국제사회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크게 개의할 바 아니지만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북한동포와 일부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선전거리로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 경계가 요구된다.<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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