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맛’ 들인 북 … “쿠쿠밥솥이 북 억양으로 말하면 대박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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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압력밥솥 제품에 북한식 억양을 입력해 판매하면 평양에서 대박 날 거다.”

 남북관계에 정통한 대북 전문가가 최근 복수의 북한 소식통 얘기를 듣고 전한 말이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이 지난달 국회 정보위에 출석해 “북한 특권층 사이에서 한국의 ‘쿠쿠밥솥’이 유행”이라고 전하면서 북한 부유층이 최신 제품인 ‘말하는 밥솥’을 못 쓰는 이유는 ‘남조선 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돈 제일주의’에 빠지면서 한국의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는 관측과 맥을 같이한다.

 북한에서 5만 달러 이상을 보유하고 호화 생활을 누리는 특권층이 6만 명에 달한다고 국정원은 추산한다. 이들 가족까지 합할 경우 24만 명, 북한 인구 2400만 명의 1%에 달한다. 신흥 부자를 가리키는 말인 ‘돈주’는 선망의 대상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극심한 식량난을 겪은 ‘고난의 행군’ 이후 배급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북한 주민에게 ‘장 마당’(시장)은 생존의 장이 됐다.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과 제임스 피어슨 로이터통신 기자가 펴낸 최근작 『북한 컨피덴셜(North Korea Confidential)』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성(性) 금기가 심했던 빅토리아 여왕 시절의 부부 생활과 21세기 북한의 시장경제는 닮은꼴이다. 모두 하고는 있지만 입에 담진 않는다.”

 북한은 배급제와 직장 선택권 등을 카드로 지배계급을 좌지우지했지만 그 관계도 끊어졌다는 게 정보당국 평가다. 암암리에 북한 주민 사이엔 “내가 알아서 돈 벌고 먹고살 테니 방해는 말아달라”는 의식이 번지고 있고 북한 지도층은 “방해는 안 할 테니 우리에게 덤비지 말라”는 묵계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북한은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 기능을 제한하는 조치를 완화했다. 상품 판매 활동을 지방관청부터 기업 등으로 확산했다. 튜더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고난의 행군’은 북한 주민의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꿨다”며 “북한 주민의 목표는 주체사상에 기반한 ‘자립’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자립’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규칙을 따르면 안 된다는 게 유일한 규칙”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연 소득이 4만 달러 이상에 달하는 고소득층이 10만 명에 달한다는 추정치도 나온다. 소득수준 향상은 명품 수요 급증으로 이어진다.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의 명품 사랑도 한몫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설주가 180만원에 달하는 프랑스산 명품 가방을 든 모습이 북한 매체에 여러 번 노출됐다. 한국산 화장품은 “중국 것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은어로 은밀히 유통된다. 일명 ‘똑똑이 장’처럼 판매자가 집집마다 물건을 갖고 다니며 문을 ‘똑똑’ 두드린 후 자기들만의 은어를 통해 거래가 이뤄지는 유통 방식도 등장했다.

 휴대전화 기술 발전도 한몫했다. 올해 초 북한은 휴대전화 보급 240만 대 시대를 맞아 체제 내 최초로 개설한 온라인 쇼핑몰 ‘옥류’를 선보였다. 인민봉사총국이 북한 내부 망을 통해 운영하는 국영 쇼핑몰로 유명 식당의 음식부터 가방·화장품 등을 폭넓게 취급한다. 결제를 위해선 ‘전자카드’가 사용되는데, 북한을 다녀온 복수의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의 일부 대학 캠퍼스뿐 아니라 곳곳에서 체크카드식의 전자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전했다.

 북한 ‘돈주’들은 최근 건축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당국이 허가를 내주면 필요한 돈은 개인 돈주들이 투자해 아파트 등 건설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아파트가 많아지면서 고급 침대·욕조 등 인테리어 수요도 늘어나고 있으며 관련 경공업 제품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한국 기업들에 ‘새로운 시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특별취재팀=팀장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김준술·김기환 경제부문 기자,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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